[김승종의 문학잡설(88)] ‘또 나는 어딜 갔다 온 걸까요’
여전히 무덥지만 요즘 아침저녁에 어리고 삽상한 기류가 우리의 살과 마음을 감았다가 풀기를 거듭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자연의 ‘사시행언(四時行焉)’ 운행을 감지하며 그 이치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성찰하거나 관련 메시지를 음미한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에게 유익한 관행이 아닐 수 없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이 시기에 더욱 그러하다. 느닷없지만 부디 우리 정치인들이 그러하기를 기원한다. 다음 시는 서두에서 가을의 주요 정경인 하늘의 ‘날아가는 오리 떼’가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며, 화자가, 군집 군무를 거듭하며 이동하는 그 ‘오리 떼’가 ‘내 넋을 뽑아 그 힘으로’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또 그래서 자신이 ‘그냥 풀썩 무너집니다’고 탄식하는데, 인간 존재와 자연현상과 이치 사이의 깊은 연계를 시사하고 있어 딱 그렇다고 할 수 없어도 이 시가 ‘가을과 사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넋을 뽑아 그 힘으로 가는지 날아가는 오리 떼를 보면 나는 그냥 풀썩 무너집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릅니다. 길모퉁이 오도카니 혼자 쪼그리고 있는 바위를 보거나 아슬아슬 하늘로 길을 내며 가는 부전나비 날갯짓을 보고 아찔하게 눈은 멀고, 먼 눈으로 더듬는 빗소리 바람소리에도 나는 그 자리 벅수가 됩니다. 내 귀가 엷어선가요? 또 나는 어딜 갔다 온 걸까요. 그 사이 여러 별이 자리를 옮겼는데. 그뿐이 아닙니다.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는 내게 딸랑딸랑 딸랑딸랑 누가 반짝이는 목소리로 손짓을 했을까요? 아니면 나를 막 스쳐간 저 행인이 안고 가는 장미꽃 살냄새가 이 모래기둥을 부울쑥 솟아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누가 어떤 넋들임이나 초혼을 했는지 나는 지금 빈 그림자 속으로 들어왔지만, 아마 나는 소리나 손짓 없는 나라로 다시 까뭇하게 빠져들 겁니다. 또 어디서 톡, 떨어진 도토리가 뒤척이는 소리에 내가 깨려나 알 순 없지만 어디에 계신가요. 나는 늘 외출 중인 내가 그립습니다. 모올래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놓을 수도 없는 이 참 어이없는 병, 남들은 모릅니다. 어디 용한 의원이나 만신은 행여 다스릴까요?
- 「나의 비밀」/홍우계
화자는 ‘날아가는 오리 떼’에 이어 자신을 ‘그냥 풀썩 무너’지게 하는 그 같은 부류로, ‘길모퉁이 오도카니 혼자 쪼그리고 있는 바위’와 ‘아슬아슬 하늘로 길을 내며 가는 부전나비 날갯짓’을 추가하여, 우리의 사정 인식과 공감에 무게를 더하고 공명을 이끈다. 전자 ‘바위’는 바위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그 수식 ‘길모퉁이 오도카니 혼자 쪼그리고 있는’으로 추정할 수 있듯,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외롭고 볼품없는 존재들을 표상하는 제유로 수용할 수 있고, 후자 ‘부전나비 날갯짓’은 역시 그 수식 ‘아슬아슬 하늘로 길을 내며 가는’에서 알 수 있듯, 힘겹고 위태하나마 역시 인간을 포함하여 어떤 이월(移越)을 지향하는 모든 존재들의 시도를 지시하는 제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화자는 이들을 목격한 자신이 ‘아찔하게 눈은 멀고, 먼 눈으로 더듬는 빗소리 바람소리에도 나는 그 자리 벅수[장승]가 됩니다’고 한다. 이 시행은 화자가 앞에서 토로한 ‘나는 그냥 풀썩 무너집니다’와 같이, 같은 넋 이탈을 취지로 한 변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벅수’는 화자 나의 은유가 아니라, 즉 나를 형상화한 이미지가 아니라, 화자 나가 바로 그렇게 변신되었다는 보고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초 일상 변신을 두고 그 원인을 화자는 ‘내 귀가 엷어선가요?’라고 다소 자책조로 화자가 설정한 상대에게 묻지만 이는 후술 문맥으로 보아 ‘아니다’는 부인을 동시에 함축하며 강조하는 반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변모의 원인이 된 문제의 ‘먼 눈으로 더듬’은 ‘빗소리 바람소리’는 그 정체와 메시지가 애매한데, ‘바위’와 ‘부전나비’의 상태와 상황에 관련되어 있거나 그 환유라고 할 수 있다.
이 시 감상에서 우리가 이제 정작 고려하여야 할 문제는 징후가 이미 나타난 대로, 화자 나의 상태가 보통 우리의 자아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 시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또 나는 어딜 갔다 온 걸까요. 그 사이 여러 별이 자리를 옮겼는데[그 사이 시간이 꽤 흘렀는데].’에서부터, 우리는 이 시의 ‘화자 나’가, 진술하는 자신과 구별되는 나, 앞에서 ‘넋’으로 표현하였던 ‘다른 나’를 의식하고 제시하며 상대에게 그 관련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그 진술에서 또한, 그 ‘다른 나’와도 구분되는 나, 즉 ‘화자 나’에서 그 ‘다른 나’가 ‘외출’[이탈]한 상태의 나, 즉 ‘벅수가 된 나’도 있다는 것도 주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에는 세 나가 있다. 사연을 진술하고 있는 화자 나, 넋으로서의 나, 벅수로서의 나. 이 셋을 다시 ‘일상의 나’[혹은 자의식 통합의 나], ‘나의 나’[넋], ‘‘나의 나’가 이탈한 상태의 나’[넋 나간 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렇듯 화자는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셋이다. 거듭 중요한 것은 ‘나의 나’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사실 ‘늘 외출 중’인 듯하다. ‘일상의 나’가 특히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외롭고 볼품없는 존재’를 목격하거나, ‘어떤 이월을 지향하는 모든 존재들의 시도’를 목도할 때마다.
나아가 우리는 이 시의 화자 나가 전지시점에서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는 내[‘나의 나’]게 딸랑딸랑 딸랑딸랑 누가 반짝이는 목소리로 손짓’을 하거나, ‘나(‘‘나의 나’가 이탈한 상태의 나’)를 막 스쳐간 저 행인이 안고 가는 장미꽃 살냄새’가 풍기면, ‘모래기둥’[‘벅수’의 은유]이 ‘부울쑥 솟아’나듯, ‘나의 나’[넋]가 ‘‘나의 나’가 이탈한 상태의 나’[넋 나간 나]로 돌아온다는 이 비밀 고백을 우리는 더욱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야 일상의 우리와 다른 이 시의 세 나에게서 느꼈던 생소한 거리를 크게 좁힐 수 있다. 그렇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하면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지 않는가. 우리는 곧 ‘나는 지금 빈 그림자 속으로 들어왔지만, 아마 나는 소리나 손짓 없는 나라로 다시 까뭇하게 빠져들 겁니다’는 진술에 직면하여 그 거리가 다시 멀어지지만, 이어지는 ‘또 어디서 톡, 떨어진 도토리가 뒤척이는 소리에 내가 깨려나 알 순 없’다는 직전과 같은 고백에서 좁혀졌던 거리를 회복하고, ‘나의 나’가 유랑 끝에 매번은 아니지만 그 최종 ‘갔다 온’ 곳이 ‘소리나 손짓 없는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된다. 잠시 휴지가 있고, 우리는 드디어 이 모든 상황을 총괄 성찰할 수 있다.
'오리''바위''부전나비' 등을 동정하고 접응한 '넋'이 그런 자연 사물과 사이좋게 동행하여 안주하는, 더 이상 '소리나 손짓 없는 나라', 그 '나라'는 어떤 곳인가. 우리가 잘 알 수 없지만 그 곳은 선경이 아니고 극락도 아니며 천국도 잔나도 아니면서도 그 비슷한 성역이다. 모든 존재의 영혼이 서로 소외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하며 안녕 안식하는 차원이라는 짐작은 가능하다.
끝으로 우리는 이 시가 의거한 형이상학과 비전의 기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대에 현상이 드물지만 저변에서 지속되고 있는 단군(檀君) 이래 우리의 전통 샤머니즘. 이 시의 키 워드, ‘넋’ ‘벅수’ ‘만신’ ‘넋들임’ ‘초혼’ 등으로 알 수 있고 또 추인할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는 내게 딸랑딸랑 딸랑딸랑 누가 반짝이는 목소리로 손짓을 했을까요?’라는 진술에서, 그 ‘목소리’가 ‘만신(萬神)’[무녀(巫女)]의 목소리이며, ‘딸랑딸랑 딸랑딸랑’은 그 목소리의 음성 상징이면서도 무구(巫具)의 하나인 신성한 방울의 소리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 시에서 그 소리가 기꺼이 강림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손짓’하고 있다.
또 이 시에는 우리 전통설화의 정겨운 모티프들도 등장하여 맥락 형성에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상(理想) 지향과 근원 회귀가 복합된 ‘날아가는 오리 떼’, 이상(異常) 존재를 탐색하는 ‘실을 꿴 바늘을 꽂’기.
과거와 미래는 현재로 연결되며, 우리 유구한 역사를 생각하면 이 시에서 융화된 그 특성들은 현대시학에서 재고를 거듭하게 한다. 오늘 세태에 우리가 아무리 분방하더라도 어찌 그 여서(餘緖)에 관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다시 말해 이 시는 물질과 유사이데올로기로 박절하기 만한 오늘의 삶을 우리의 시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희석하게 하는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