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원효성사 깨달음의 성지 ‘해문 당주계(海門 唐州界)’는 화성시에 있다

이수원 / 수원일보 남부취재본부장
송나라 ‘송고승전’에 등장하는 지명 '해문리' 들녘. (사진=이수원 남부취재본부장)
송나라 ‘송고승전’에 등장하는 지명 '해문리' 들녘. (사진=이수원 남부취재본부장)

‘해문 당주계’는 송 태종의 명을 받아서 송나라의 승려인 찬녕이 서기 988년에 완성한 '송고승전' 의상 편 의해에 나오는 기사 중의 한 구절인 ‘행지 본국 해문 당주계 계구거함 장월창파 (行至 本國 海門 唐州界 計求巨艦 將越滄波)’에 나오는 지명이다. 원효성사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당주계 해문에 도착하여 큰 배를 구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했다는 기록이다. 송고승전은 서기 630년 경부터 서기 980년까지 약 350년 동안 활동한 승려 533명의 전기와 130인의 부전의 기록이다. 의상과 원효뿐 아니라 진표와 원표 등의 승려들이 기록이 된 기록물이다.

흔히 지명은 그 지역의 지형적 특성이나 역사적 사실, 전설 등의 개입으로 불려지고 전승되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로 미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고 도착한 곳의 땅이름인 '해문 당주계(海門 唐州界)'를 특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바로 그곳이 원효성사가 일체가 마음의 작용임을 깨우친 오도처가 되기 때문이다.

원효성사가 의상과 2차로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해가 서기 661년으로 원효성사의 나이가 44세 때이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이니 요즘 나이로는 70 중반의 나이에 유학을 결심한 셈이다. 참으로 독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송고승전에는 의상과 원효 외에도 진표와 원표 등의 승려도 언급이 되어있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큰 강이나 산이 가로 막히면 쓰는 말과 섭생도 차이가 날 때이다. 하물며 바다를 건너서 산 사람의 기록이니 웬만큼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원효성사가 당나라와 송나라까지 그 유명을 떨쳤다는 반증이다. 찬녕이 송고승전 집필에 착수한 때가 서기 980년이니 무려 8년 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완성을 한 것이다. 원효성사 사후 약 300년 뒤의 일이다. 약 300년 전의 지명이 언급된 것이니 현대에도 그 지명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해문(海門), 혹자들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땅의 위치를 통칭하는 일반명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언뜻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한반도의 서쪽 바닷가는 리아시스식 해안을 가지고 있다. 북쪽 평안도에서 남쪽 전라, 경상도까지 수 없이 많은 굴곡의 해안선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는 해문이라 부를 수 있는 지형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이를 근거로 해문이 일반명사라 주장하는 강한 이론적 뒷배가 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당주계를 특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짐작컨대 충남 당진부터 위로 인천 부근까지 상정하기도 한다. 서기 661년이면 올해부터는 1363년 전이고, 찬녕이 집필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때인 서기 980년이라해도 1044년 전의 일이다, 그러므로 당주계(唐州界)를 특정하는 일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그렇다면 해문(海門)은 어떤가? 당주계를 특정하기는 어려워도 해문은 어찌되었던 당주계 안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겠다. 백 번 양보하여 이 한반도 전체를 당주계라 가정을 해보자. 해문은 이 한반도의 어딘가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려 했으니 서남해안 어떤 바닷가 근처인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백제의 멸망으로 당나라로 가는 서남해안 뱃길이 비로소 열렸고 그곳이 해문 당주계라고 송고승전의 저자인 찬녕은 기술하고 있다. 해문을 일반명사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위에서 예시했듯이 당주계 안에는 무수한 해문이 존재해야 한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지형을 서남해안은 부지기수로 가지고 있고, 적어도 서너 개의 해문은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해문을 특정하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해문이란 지명을 찾아보자. 구글과 네이버에 해문이란 지명을 넣어보니.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가 유일하다.

평택시 수도사의 지표조사를 했던 엄기표 교수는 원효성사의 오도처가 되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화성시 문화유산과 학예사들도 엄기표 교수의 이론에 동의한다. 화성시 마도면 주민자치회가 주민들의 숙원 사업으로 신청한 원효성사 오도처 기림비를 세우기 위한 사업의 반려 사유로 단국대 엄기표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제시했다. 반려문에서는 엄기표 교수의 이름은 ㅇㅇㅇ으로 표기했으나 원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논문의 저자가 단국대 엄기표 교수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엄기표 교수가 언급한 여러 조건이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백제고분군’ 주위에 산재한다. 특히, 송고승전에서 언급한 해문 당주계의 해문이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라는 법정 지명으로 존재한다. 해문리는 현재는 온전한 육지이나 조선 후기까지 바닷가였다. 자료에 따르면 해문리에는 조선시대의 역참인 해문역이 설치돼 있었다.

이 지역은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한 항구였다. 조선말 고종의 아버지로 섭정을 통해 조선의 전권을 행사하다 청나라로 끌려간 대원이 대감 흥선대원군이 배를 탄 곳도 ‘화성시 송산면 마산포’였다는 명백한 기록이 있다. 백제와 신라도 이 일대에서 당나라로 가는 배를 띄웠음을 알 수 있다.

해양학자 윤명철 교수는 이것을 실제로 입증을 했다. 현재의 당성이란 지명이 당항성(唐項城)으로 표기되던 때가 있었다. 길목 항(項), 어딘가로 가는 길목이란 얘기다. 당나라로 가는 길목이란 뜻이었다면 이 근처 어딘가 ‘해문 당주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것은 송고승전의 ‘행지 본국 해문 당주계 계구거함 장월창파’를 읽은 학자들이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현재의 해문리 곁에는 우연히도 백제고분군과 백사지, 당나라로 가는 항구였던 마산포, 당항성 등이 산재한다.

‘해문 당주계’의 해문이 현재의 해문리였음을 유추할 이 많은 단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에 유일한 지명인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가 ‘해문 당주계’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는 것이 더 지난한 일일 것이다. 해문 당주계(海門 唐州界)의 해문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임이 엄기표 교수의 논문에서 역설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엄 교수는 원효성사 오도처 확정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옛무덤, 절터, 배후의 항구 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해문리 일대 백곡리에는 ‘백제고분군’ ‘백사지 절터’ ‘은수포와 마산포’ ‘당성’이 존재한다.

엄기표 교수가 언급한 조건들이 있는 '해문'이 이 땅 어디에 있는가?

그 유일한 지명이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이다. 그러므로 송고승전의 ‘해문 당주계’는 일반명사가 아니며 특정 지명이 된다. 지금이라도 화성시가 적극 나서서 이런 사실을 적극 공표하고 성지(聖地)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