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89)] ‘아무리 봐도’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셀카 유행도 오래되었지만 사진 촬영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년층에게서는 드물고 장년 이후 연배에는 꽤 있어 보이며 사진을 기피한다거나 외면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 주변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혹시 늙은 모습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래도 사진은 덧없는 시공의 이 세계에 현시하는 손쉬운 존재증명이기도 한데... 아니라면, “사람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에 혹시 관련되는 건가. 자신의 얼굴을 책임질 수 없어서? 그렇다면 그 태도는 책임 회피가 아니라 책임 구현의 자의식에서 말미암는다고 할 수도 있다. 일종의 과잉일 수 있지만 요즘 세태에서 보기 드물게 오히려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의식의 발로일 수 있어서. 우리는 오늘의 이상한 세태에서 이를 자못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의 혼란과 패악은 주로 그럴듯한 변명으로 자신과 남을 기만하면서도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는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인간.

 그런데 우리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여야 할 사안도 있다. 헝클어진 반백 모발, 턱과 뺨을 괸 주름진 두 손,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내리 감은 눈. 자신의 그런 사진을 굳이 시집의 표지에 공개한 사례. 그저 그 사진만이라면 혹 링컨의 취지에 직결되는 그 일환이 아닌가 여겨볼 수도 있겠고, 위의 이견 사설(辭說)과도 관련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진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고 통탄하는 시가 수록되어 있어 우리는 당혹스러워진다.    

 

내 얼굴 속에는

가난이 없구나 어둠이 없구나 굴욕이 없구나 망가짐이 없구나 야비함이 없구나 시들어빠짐이 없구나 철저한 짓밟힘 처절한 헤어짐이 없구나 떠내려감이 없구나 미워함, 표독스러워라, 불붙는 증오가 없구나 굵은 뿌리 꿈틀거리는 절규와 절망 아우성이 없구나 욕정의 흙탕물 넘쳐흐르는 엉망진창이 없구나 아픔도 괴로움도 투쟁도 갈등에 찢어짐도 없구나 시샘의 시궁창 악취도 없구나 하다못해 나태와 방종 싸구려 분내도 없구나 내 얼굴 내 영혼 읽을거리가 없구나 수염 뽑히고 침 뱉고 모욕이 없구나 아무리 봐도 기쁘고 성스러운, 모욕이 모독이 비참이 쭈글쭈글함이 징글징글함이 괴상망측함이

                            - 「동안(童顔)」/윤한로

 

 ‘내 얼굴 속에는/가난이 없구나 어둠이 없구나 굴욕이 없구나 야비함이 없구나’라는 급박한 탄식의 연쇄는 대번 우리의 시선으로 하여금 미인도 이상으로 그 얼굴을 자세히 살피게 한다. 침착하기도 하고 격정을 이기지 못하기도 하는 어조에 실려 있는 그 부재의 자기힐난에서, 대체 화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술이 역설인가 혹 위선인가 하며, 이윽고 둘 중 하나로 추인하면서 인식의 정합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읽는다. 그러나 그 애매는, ‘불붙는 증오가 없구나 굵은 뿌리 꿈틀거리는 절규와 절망 아우성이 없구나’까지 그대로 이어지면서 증폭되고, 그러다가 ‘욕정의 흙탕물 넘쳐흐르는 엉망진창이 없구나’에 이르러서, 우리는 진술이 의외에도 사실 토로이며 또 의외에도 무슨 다른 의도가 있지 않다는 기미를 감지할 수 있다. 아무리 위선이라고 하더라도, ‘욕정의 흙탕물’이 ‘넘쳐’ 흘러 ‘엉망진창’이라 하기는, 과도하고 어색해서 곤란하지 않을까 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화자가 은연 중 자신의 ‘욕정’이 ‘흙탕물’이 되어 자신의 몸을 ‘넘쳐흐르’기를 한때 욕망했었다는 일탈 기운을 느낀다. 그것도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하지만 또 동시에 미수에 그친 그 분출을 좀 유감스러워하는 화자의 의식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다시 복잡해지지만 나아가 ‘아픔도 괴로움도 투쟁도 갈등에 찢어짐도 없구나’를 읽고, 드디어 작중에 밀착되어 있던 시선을 거둬 이 시의 밖으로 돌려 그 관련된 현실을 본다. 저 80년대의 혼란과 충돌을 좌절과 고함을, 학교 근처 골목 술집에서 최루가스에도 취한 화자의 모습을. 우리는 이제 화자의 모든 자기 묘사 토로가 지나온 개개 국면의 현실에 투영된 자아의 굴곡을 스케치한 직설 자전(自傳)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하여 이어지는 ‘시샘의 시궁창 악취도 없구나 하다못해 나태와 방종 싸구려 분내도 없구나’에서 화자 인격의 정체성을 더 이해하면서 짙게 배인 이 유감에 애초 의아를 새카맣게 잊고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분수를 넘어 동정하기도 한다. ‘시샘의 시궁창 악취’는 어쨌든 졸렬하고 천박하며 잘못하면 부당한 성취를 오히려 합리화하고 말지 않느냐, ‘나태와 방종 싸구려 분내’는 어쨌든 결국 지저분한 패가망신의 첩경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그런데 ‘내 얼굴 내 영혼 읽을거리가 없구나 수염 뽑히고 침 뱉고 모욕이 없구나’를 읽으면서는, 화자가 자신을 질타하는 막중한 유감의 부피와 막심한 모멸의 기운을 독자 우리도 감당하기 어려워 눈을 거의 감는다. ‘내 얼굴 내 영혼’에 그런 ‘읽을거리가 없’다면 그렇다면 아니 다행 아닌가고 반발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심장에 스며드는 어떤 빛을 제어하기 어렵다. 마지막 시행, ‘아무리 봐도 기쁘고 성스러운, 모욕이 모독이 비참이 쭈글쭈글함이 징글징글함이 괴상망측함이’를 그 빛으로 담담히 읽으면서, 그 끝의 생략에 화자를 대신해 ‘없구나’ ‘없구나’ 중얼거리며 이 시 읽기를 마친다. 

 다시 말해 이 시는 화자나 어쩌면 시인이 직면하였던 사회와 직장, 그리고 갖가지 시장을 거쳐 온 자아의 궤적, 그 회고의 진술이며, 진술 당시의 연령은 장년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관된 의도의 맥락이 진행되면서 시행들의 미묘한 의미 편차와 세밀한 추이가 주목된다. 과도하면서도 양해할 수 있는 진정성이 흐르는 맥락을 음미하다보면 이 시에는 무슨 기교가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무슨 전략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화자의 기맥에는 범접하기 어렵거나 마다해야 할, 겸허한 자의식을 유지하는 용기가 저류를 이루고 있다. 이 용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화자는 ‘내 얼굴’뿐만 아니라 ‘내 영혼’에도 ‘모욕’과 ‘모독’, ‘비참’, ‘쭈글쭈글함’과 ‘징글징글함이’ ‘없구나’고 탄식하며, 모두 ‘기쁘고 성(聖)’스럽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와 예수의 골고다 수난을 떠올리며, 그 용기의 기본과 발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침착하기도 하고 격정을 이기지 못하기도 하는 화자의 어조, 그 어조에는 분노도 배어있는데, 아마 밖보다는 자신을 더 질타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이 시를 읽고 나서 시인의 의도가 아니겠지만 우리가 ‘내 얼굴 내 영혼’은 과연 어떠한지 한번 살펴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내 얼굴 내 영혼 읽을거리가 없구나’란 탄식만은 거두절미하고 우리가 그 여부를 떠나 쉽게 외면한다면 아무래도 부끄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