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23)] 구향순 '아니 그냥'
아니 그냥
구 향 순
늦은 퇴근길 버스 안 저 남자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아니 그냥
잘 사는지 궁금해서라고
아, 어느 날 한밤중
풋풋해서 슬펐던 그 사람
잦은 헛기침으로
오래 묵은 안녕 물어온다면
정말 그런다면
흐르는 긴 침묵 사이
핏빛 능소화 파르르 떨고
다시 말문 턱 막힌 하늘
휘갈겨 쓴 궁색한 변명처럼
급한 소나기 한 줄 퍼붓겠지
한동안 마음 술렁일 거야
귀밑머리 세어
등 쓸쓸한 저 남자
아니 그냥
나도 평소에 자주 쓰는 말이다. 누군가가 막연히 그립다. 못 견딜 만큼은 아니지만 가슴이 짠하게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저쪽에서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다. 그때 습관처럼 하는 말이 ‘아니 그냥’이다.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한 친구가 하는 말도 ‘아니 그냥’이다. 그러나 사실은 많은 말이 들어 있는 그 대답을 우리 또한 그냥 그냥 넘긴다.
‘아니 그냥’은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을 대신하는 말일 수 있다. 보고 싶다든지, 건강에 대한 안부 혹은 어떤 경우는 ‘사랑해’를 대신하는 말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차마 달라고는 못 하고 지난번에 빌려 간 돈 언제 갚을 거야를 대신하는 말일 수도 있다. 한 사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 ‘늦은 퇴근길 버스 안 저 남자/어디론가 전화를 건다/아니 그냥/잘 사는지 궁금해서라고’ 버스 안의 적막함 속에서 조심히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인은 문득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해온다면, 전화를 해 온 사람이 ‘아, 어느 날 한밤중/풋풋해서 슬펐던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잦은 헛기침으로/오래 묵은 안녕 물어온다면’이라는 상상으로 빠져든다.
무심한 혹은 야속할 수도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흐르는 긴 침묵 사이/핏빛 능소화 파르르 떨고/다시 말문 턱 막힌 하늘/휘갈겨 쓴 궁색한 변명처럼/급한 소나기 한 줄 퍼붓겠지’처럼 실로 오랜만의 전혀 예상치 못하게 걸려 온 전화는 마음속에 한줄기 소나기가 퍼붓고 지나간다. 다시 버스 안을 살핀다.
늦은 시간 퇴근 버스를 탔다. 그 시간 그 버스를 타는 사람은 거의 대개가 일상이 녹록지 않은 사람들일 게다. 통화를 끝낸 사내의 등이 누군가의 등과 오버랩 된다. ‘한동안 마음 술렁일 거야/귀밑머리 세어/등 쓸쓸한 저 남자’이다. 사실은 시인의 마음도 술렁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정보도 담고 있지 않은 네 음절의 ‘아니 그냥’에 수시로 마음이 일렁이는 것이다.
위의 시는 2021년 구향순 시인이 펴낸 시집 『바람의 견인』에 실린 시 ‘아니 그냥’의 전문이다. 시집에 실린 60여 편의 시가 한결같이 묵직하다. 결코 허튼 사유나 가벼운 수사가 난무하는 시가 아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곤고한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위안이 되는 시들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 수원을 떠나 서천으로 간 지도 제법 세월이 흘렀다. 물론 수원에 자주 온다. 그래도 수원에 살 때만큼 자주 보지는 못한다. 내일쯤 한번 전화를 걸어야겠다. ‘웬 일이냐’고 물으면 ‘아니 그냥’이라고 해야지.
그 말속에 담긴 뜻을 짐작하는 일은 구향순 시인의 몫입니다.
구향순 시인
2007년 『창작과 의식』 신인상 당선
시집 『귀향 연습』, 『바람의 견인』
공저 『햇살 드리워진 창가에 서서』 外 다수
경기시인상 수상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시인협회 사무국장
소로문학골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