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90)] ‘키 작은 억새에 바람이 베이는 정상’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우리는 이 세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든 언제부턴가 가슴에 이상 하나는 품고 있다. 그 형상은 삶과 욕망에 분주해서 보이지 않고 있고, 어떤 기회에 과감하게 오히려 탈아(脫我)의 성찰을 시도하면 볼 수도 있다. 그 형상은 각자 사정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다음 시에서처럼 수미산(須彌山) 같은 성산(聖山)으로 현현할 수 있다.     

 

하나의 산이 되기 위해서는

그저 올라가야만 한다.

숨 가쁜 중턱의 그 청청한 나무 밑

새소리, 물소리 감미로운 골짜기도

모두 모두 눈 감고

보다 멀리 보기 위해서는

그저 올라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어서는

하나의 산봉우리

저기 건너다보이는

야트막한, 혹은 아스라한 눈 덮인 봉우리

소리쳐 부르면 모두들 달려올 것만 같은

산, 산들

 

하나의 산이 다른 산을 만나려면

허리로 발치로 내려와야만 한다.

나무 한 그루 없이 그저

키 작은 억새에 바람이 베이는

정상의 외로움.

봉우리에서는 아무도 서로

만날 수 없다.

내 산정의 고적(孤寂)을 그들이 모르듯

그들의 정수리에 감도는 안개를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내려와 팔을 벌리고

서로의 갈라진 발, 산발한 머리칼에 입맞출 때

비로소 들리는 푸른 물소리, 하얀 새소리

마침내 골짜기여라.

그대를 키운 보잘 것 없는 들판과

나를 기른 투박한 구릉에 물결치는

저리도 푸른 생명, 생명들

아아, 하나의 산이 되기 위하여

올라가야만 하지만

다른 산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그저

내려와야만

내려와야만 한다는 것을.

   - 「수미산(須彌山)을 그리며」/전범수

 ‘하나의 산이 되기 위해서는/그저 올라가야만 한다’는 정화된 탄식과 용맹한 정진의 목소리, 우리의 그 결곡한 심정이 경유하여야 할 향상의 의지와 행로의 이치를 대변하기에 우리는 별 이의 없이 동의한다. 그리하여 ‘숨 가쁜 중턱의 그 청청한 나무 밑/새소리, 물소리 감미로운 골짜기도’[이웃의 명랑하고 풋풋한 생명의 동태 동향도] ‘모두 모두 눈 감고’, 즉, 시선을 주거나 정겨워하지 말고 초탈하여야 할 그 무엇으로 알고 일심으로 ‘그저 올라가야만 한다’는 다짐에도 우리가 애초에 각오한 바와 같아서 좀 새삼스럽고 좀 비장해지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하여 마침내 일어서는/하나의 산봉우리’를 읽으며 좀 성급하지 않은가 하면서도 성실한 그 경로의 여운과 더불어 그 성취를 인정하며 그 상태가 어떠한지 궁금해 직후의 시행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 상태는 화자의 시각에 맺힌, 그 정상 아래에서 엎드리고 있는 가깝고 먼 산들의 정경이다. ‘저기 건너다보이는/야트막한, 혹은 아스라한 눈 덮인 봉우리’. 그래서 우리는 두보의 시 「망악(望嶽)」의 끝 두 구 “會當凌絶頂(회당릉절정 :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 一覽衆山小(일람중산소 : 저 아래 뭇 작은 산들을 한 번 내려다보리라)”와 그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연상한다. 하지만 곧 우리는 이어지는 화자의 심사, ‘소리쳐 부르면 모두들 달려올 것만 같은/산, 산들’을 낯설게 읽으며 다시 긴장한다. 이 시행이야말로 화자가 등정 직후 경지를 자신에게도 토로한 자신도 모르게 발설하는 언급이 아닌가. 즉 화자는 갖가지 뭇 작은 산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호쾌한 입지를 자찬 자긍하지 않고 – 그렇더라도 우리는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 자신과 등차 없으며 또 서로 동정하고 유대할 수 있는 이웃[도반]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심사는 어쩌면 낯익다고 할 수 있지만 직전 맥락과 엄연히 맞서며 부조화의 조리를 이루는 계기이기도 하여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다시 말해 감내 가능하였지만 ‘一覽衆山小’에 비껴있는 오연(傲然)한 기운도 없어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제2연에서 왜 화자가 마침내 이룩한 등정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이 도달한 ‘정상’이 알고 보니, ‘나무 한 그루 없이 그저/키 작은 억새에 바람이 베이는’ 비정한 곳이며, ‘아무도 서로/만날 수 없’는 ‘고적(孤寂)’이 감돌아 그 외로운 상태를 감내하여야 하는 빈 공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 있겠고, 그렇다면 저 가깝고 먼 산들도 같은 처지가 아니겠는가란 함축에도 우리는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정수리에 감도는 안개를/나는 알지 못한다’는 화자의 연민성 동정에 놀라기에 앞서 먼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안개’는 반드시 걷어내야 한다는 함께 표명된 의지에도. 

 우리는 이러한 심성과 지향에 감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상태로 끝난다면 미진하다 할 텐데 다행히 우리는 제3연을 읽을 수 있다. 화자는 결심한다. ‘내려와 팔을 벌리고/서로의 갈라진 발, 산발한 머리칼에 입맞출 때’에 ‘비로소 들리는 푸른 물소리, 하얀 새소리/마침내 골짜기여라.’ 이 반전의 각성과 소신의 어조에 우리도 감회로 뭉클하다. ‘산이 되기 위해’ 산을 오르면서 화자가 필생의 의지로 간과하였던 그 ‘골짜기’와 그 ‘그 청청한 나무 밑/새소리, 물소리’. 또한 그 ‘골짜기’에는 ‘그대를 키운 보잘 것 없는 들판과/나를 기른 투박한 구릉’이 있고, 거기서 ‘물결치는/저리도 푸른 생명, 생명들’도 서식한다. 다시 말해 ‘나무 한 그루 없이 그저/키 작은 억새에 바람이 베이는’ 비정한 곳이 아니며, ‘아무도 서로/만날 수 없’는 ‘고적’이 감돌아 그 외로운 상태를 감내하여야 하는 빈 공간도 아니다. 형이하에서 형이상으로, 그리고 형이상에서 형이하로 귀환하는 여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우리 세속의 범박한 삶을 결국 포기하지 않고 서로 대등하게 소통하고 존중하며 긍정하는 목소리가 충만한 공간이다. 

 우리가 품은 이상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회는 우리 모두 인정할 수 있으며, 우리가 우리를 대자대비(大慈大悲)로 승화하면 우리를 키우고 기른 ‘보잘 것 없는 들판’과 ‘투박한 구릉’에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시에서 우리는 드디어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