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91)] ‘허, 허, 흠씬 어둠에 두드려 맞아 얼얼할 텐데’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우리에게 우리가 미워하고 미워하여 위선으로라도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대상이 있을 수 있다. 상대가 우리를 비웃으며 용납을 바라지도 않겠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하기만 하여 그런 증오가 자신에게 결국 욕이 되고 해가 된다고 누가 걱정하며 말려도 초가삼간 태워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 용서와 감안은 그저 흐리고 아득한 그림자, 한심하고 우울하게 저미는 심정은 오히려 달콤하고 짭짤한 사탕. 다음 시의 화자는 아마 한번 쯤 그런 수렁에 빠졌다가 겨우 헤어 나온 경험을 심층에 두고 쓴 어느 날의 일기 같은 토로로 보인다.

           

남과 북이 악수하던 날이었어요

아니 감자 캐는 날이었어요

핸드폰도 끄고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예민하신 어머니도

생리통이 심한 딸애도

여하튼

어떤 사람도 그리워하지 않고

감자만을 위해 

땀 흘리고 싶은 날이었어요

 

감자가 나왔어요

눈만 도려내 심었던 감자가,

그 감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그 습기와 치욕의 시간 속에서

알알이 둥글어진 은총을 키워냈어요,

맹랑한,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네요

맹랑해서 명랑한 감자들

허, 허, 흠씬 어둠에 두드려 맞아 얼얼할 텐데

묻어 올라온 어둠의 젖은 흙을 털며

올망졸망 여남은 아이들의 손을 이끌며

그는 말해주었어요

 

봅시다 그래도 우리가 무에 사랑 받을 구석이 있긴 있나봅니다

 

이런 사람

이런 사랑 보셨어요.

제 몸 도려 가둬 놓았더니

손 귀한 집 자식 낳아 주는

미친 사랑 그런

사랑스런 원수를 본 적 있으세요

           - 「뜨거운 감자를 캐며」/오준  

 

 ‘감자 캐는 날’의 이 기록은 지난 어느 ‘남과 북이 악수하던 날’의 기록이었기도 하여, 외연의 진폭도 크다. 그런데 개권 그 첫 행에 의외로 부연이 따르지 않고 느닷없이 ‘아니 감자 캐는 날’이라고 무슨 부인의 기미가 어린 듯한 선회가 어색하게 들어서서 바로 그래서 이 시의 주제가 남북문제가 아닐까 가늠하게 한다. 1연에서 이어지는 ‘여하튼/어떤 사람도 그리워하지 않고/감자만을 위해/땀 흘리고 싶은 날이었어요’란 진술도 어디까지나 ‘감자’를 부각하고 있지만 어째 변명처럼 들리고, 게다가 이 시 끝까지 ‘남과 북이 악수하던 날’에 어떠한 후술도 없어서 더욱. 따라서 우리는 2, 3, 4연도 감자를 캐면서 보고 느끼고 겪은 정회 진술로 경청하면서도 남과 북의 만남을 매개로 상호 입장에 관련된 의사를 짐짓 부각하고 있다고 접근할 수 있다. 

 우선 이 시에서 화자가 감자를 심은 동기가 수상하다. 재배와 수확에서만은 아닌 듯. ‘눈만 도려내 심었던 감자’라고 한 바, 씨감자의 눈을 잘라내서 땅에 심는 작업 행태의 묘사로 제한할 수 있지만, 한편 우리로 하여금 긴장을 조성하게 한다. ‘눈만 도려내 심었던 감자’라니, ‘아니’, 이는 증오에 마비되어 자포자기 감행하고만 잔인무도한 처사를 은연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일종의 도착(倒錯) 행위를 자기도 모르게 고백?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도 그리워하지 않고’도 수상한 표현으로 느낄 수 있다. 아무리 ‘감자만을 위해/땀 흘리고 싶은’,  ‘감자’에만 몰두하고 싶은 날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1연에서 모든 지인들뿐만 아니라 ‘어머니’ ‘딸애’뿐만 아니라 심지어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연상하면서 어째서 아내만은 그러지 않는지 의아하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단순한 생략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관련 시행들에서 화자가 오히려 누구보다도 아내의 부재를 의식하며 더 그리워하고 있지 않나 의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어떤 사람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토로에 더욱 의심을 품으며, 나아가 ‘감자만을 위해/땀 흘리고 싶은 날이었어요’에서 ‘감자’의 정체와 그 몰두에도 의혹을 일으킨다. 또 화자가 우리에게 자신이 2연 3, 4행, 땅에 묻힌 ‘감자의 눈’이 견뎠던 ‘어둠 속’ ‘그 습기와 치욕의 시간 속’에 자신도 있었다고 암시하는 건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물론 화자는 현재 그 ‘감자의 눈’처럼 ‘알알이 둥글어진 은총을 키워’내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렇듯 이 시는 우리의 독해를 지연시키며 신중하게 한다. 

 아무튼 이 시의 핵심은 그 ‘감자’는 ‘사랑스런 원수’란 이야기일 것이다. ‘감자의 눈’은 다시 말해 ‘습기와 치욕의 시간’을 지내며 오히려 ‘알알이 둥글어진 은총을 키워냈’고, 바로 그래서 화자는 ‘맹랑해서 명랑’하다고 하였다. 또 ‘흠씬 어둠에 두드려 맞아 얼얼할 텐데’도 불구하고 자식 같은 ‘올망졸망 여남은 아이들’[작은 어린 감자들]도 데리고 ‘어둠의 젖은 흙’에서 나와 화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봅시다 그래도 우리가 무에 사랑 받을 구석이 있긴 있나봅니다” 

 좀 애매하지만 의인화된 감자의 이 언급은, 자신의 그런 상태, 다시 말해 자신을 증오하고 칼질하고 파묻은 화자 그대를 외면하지 않겠지만, 고난과 수모를 감내하고 생육과 번식을 성취한 자신을 그대도 대면하라는 뜻인 듯.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서로 의아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사랑 받을 구석’이 있다... 즉 보기 어렵지만 공들여 살펴본다면, 잘 드러나지 않는 치우쳐 있는 그런 부분이 있기는 있다고 인정하자는 제안이다. 화자는 ‘감자’의 그 제안을 인정하며 ‘감자’를 드디어 ‘사랑스런 원수’라고 하였다. ‘감자’ 역시 화자를 그렇게 부를 것이다.  

 ‘남과 북이 악수하던 날’에 아마 남북을 묶어 대리하는 듯한 화자는 증오로 베어 파묻었던 ‘감자’를 캐면서 남북의 심정을 이상과 같이 대변하였거나 그 ‘악수’의 의미를 그렇게 부연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통일하지 말자”며 남북 2국가론을 제기하는 주장이 있었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북의 통치자가 선행 발론하여 불편한 가운데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대치가 심화된 남북의 오늘을 새삼 고려한 일부 현실론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남북 교류에서도 별 현실성이 없었고 현실성이 있든 없든 통일은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직면하고 있는, 유예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자 대의이다. 남북이 어떤 대립과 배척을 하더라도 자족을 도모하더라도 분단은 정상이 아니다. 

 이 시는 2006년 1월에 발간된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전에 씌어졌는데, 그 메시지가 한반도 비핵화가 짙게 회의되는 2024년 현재 정세에서 용인되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시기에 더 읽히고 음미되어야 할 작품이다. 판도라의 열린 상자. 뛰쳐나온 핵, 불신과 적대, 위구와 증오... 다시 말해 이 시를 앞으로도, 그 상자의 외지고 외진 구석에 언제나 여전히 겨우 남아있는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화자가 우리에게 건넨 4연 말의 상태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사랑 보셨어요.’ 화자는 자기가 본 ‘감자’의 그 ‘이런 사랑’을 우리가 이미 보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체험의 기정사실로 단정하는 이 의사는 직후에 반복 강화되고 있다. ‘손 귀한 집 자식 낳아 주는/미친 사랑 그런/사랑스런 원수를 본 적 있으세요’. 그랬던가. 우리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윽고 지난날에 한 번인가 ‘본 적’이 있기는 한 것 같다고 시인한다. 화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고 권유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시를 우리 생애의 여러 결핍과 증오를 극복하는 어떤 ‘미친 사랑’, ‘습기와 치욕의 시간 속에서’ 잉태되고 발육된 그 사랑을 노래하는 시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