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92)] ‘함께 잠들기를 잊지 말아다오’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며 당대 현실에 관련된 주제나 메시지를 그 이후의 결과나 후세 현재의 상황에서만 평가하거나 그 공과를 쉽게 재단해서는 미진하다는 이치를 알았다.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미래를 알 수 없는 한계와 변수가 있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지만, 우리의 양식은 그 말의 부조리 측면을 불식하지 못한다. 해방 시공에서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이자 조선공산당 당원이었으며, 휴전회담에서 조중대표단 북측 영어 통역이었던 시인 설정식은 1953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죄목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국가 전복 기도(企圖)’ 시인은 그 7년 전인 1946년 7월 23일에 〈동아일보〉에 다음 시를 발표하였었다.   

 

바람이

모든 꽃의 절개를 지키듯이

그리고 모든 열매를 

주인의 집에 안아 들이듯이

아름다운 내 피의 순환을 다스리는

너 태초의 약속이여

그믐일지언정 부디

내 품에 안길 사람은 잊지 말아다오

 

잎새 가장귀라 불고 지나가도

종내사

열매에 나서와 잠드는 바람같이

바다를 쓸고 밀어 다스리는

너 그믐 밤을 혼자 안은 섭리여

그 사람마저 나를 버리더라도 부디

내 아름다운 피에 흘러들어와

함께 잠들기를 잊지 말아다오

        - 「달」 : 처녀 중에서/설정식(1912-1953) 

 

 8행으로 짜인 두 연이 단정하게 병렬된 이 시. 하지만 우리는 심상치 않은 화자의 간절한 소망을 점점 복잡하게 주목하게 된다. 화자는 1연에서 ‘그믐일지언정 부디/내 품에 안길 사람은 잊지 말아다오’라고 부탁하고, 2연에서 그 ‘안길’ ‘그 사람마저 나를 버리더라도 부디/내 아름다운 피에 흘러들어와/함께 잠들기를 잊지 말아다오’라고 마치 임종을 앞두고 유언하듯 ‘달’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 호소는 예정의 가정이지만, 1연에 이어 2연의 말미에서 반복되는 ‘잊지 말아다오’로 하여 사실로 도래할 기미와 예감이 배어 있어 그 성격이 흐려진다. 우리는 그 ‘사람’이 급기야 화자를 외면할 것 같다는 예감을 화자와 더불어 지우기 어렵다. 사랑하고 있지만 이별을 예비하고 또 회귀의 재회를 염원하고 있는데, 이 상태의 심정은 이별의 정한보다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가 아닌 게 아니라 화자가 작중에서 우러르는 ‘달’도 우리가 소원을 빌며 바라보는 환하고 둥근 모습이 아니다. 1연의 ‘그믐일지언정’에서 알 수 있듯, 그 ‘달’은 보름달이 아니고 반달도 아니고 ‘그믐달’이다. 이 달은 ‘잔월(殘月)’이란 별칭대로, ‘새벽녘까지 지지 아니하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거의 다 져 가는 달’이다. 왜 하필이면 화자는 그런 호소를 하며 그런 달을 우러렀을까. 아무래도 화자와 관계의 여건이 그 기운 ‘달’처럼 어둑한 상황이었기 때문인가.  

 하지만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화자는 그 ‘그믐달’을 오히려 ‘태초의 약속’이라 하여 시원성을 부여하고, 또 ‘바다를 쓸고 밀어 다스리는’ ‘그믐 밤을 혼자 안은 섭리’라며 밀물 썰물을 주재하는 인력(引力)과 홀로 어두운 밤하늘을 교교히 포용하고 있다고 그 위상을 환기하고 있다. 화자가 ‘그믐달’을 그렇게 형상화하는 의도는 자신을 버릴 ‘그 사람’이 결국 자신에게 마침내 돌아와 ‘내 아름다운 피에 흘러들어와/함께 잠들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즉 썰물처럼 떠나가게 하더라도 밀물처럼 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다. 화자는 그믐달에게 이를 ‘잊지 말아다오’라고 한다. 화자가 앞에서 ‘너 태초의 약속이여’라고 그믐달을 은유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시인의 이력과 이 시가 실린 시집 『종』(1947)의 다른 시편들의 경향을 감안하여 이 시를 해방 시공의 한 정치 관련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지만, 언표 그대로 사랑의 연시(戀詩)로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이 시에서 직유의 주체로 등장한 ‘바람’도 주목된다. 이도 우리의 통념과 달리 아니 반대로 ‘바람’은 불어 ‘모든 꽃의 절개를 지키’며, ‘모든 열매를’ 수확하여 ‘주인의 집에 안아 들이’는 주선을 한다. 또 ‘잎새 가장귀라 불고 지나가도/종내사/열매에 나서와 잠’드는 귀결과 안식의 존재이다. 부제로 보아 화자를 한 ‘처녀’라고 추정할 수 있겠으며, 그녀의 진술 어조는 잔잔하지만 격정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시인 설정식의 생애 마지막 국면. 휴전회담을 북에서 취재하고 설정식의 시집 『우정의 서사시』를 자기 나라에서 출간하게 했던 헝가리 기자 티보 머레이는 ‘문학과 평화’를 주제로 한 2005년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평화를 위한 글쓰기」를 발표하며 재판정에서 본 친구 설정식을 회고하였다.

  피고들은 구겨진 죄수복을 입고 있었고, 등판에 죄수 번호가 달려 있었다. 1번 피고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자 법무성 장관을 지낸 이승엽이었고, 마지막 제14번 죄수가 바로 설정식이었다. 나는 그를 거의 알아보지 못하였다. 본디는 수려했던 그러나 고문으로 뒤틀린 그의 얼굴은 체념과 탈진으로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로봇처럼 움직였다. 나는 간절하게 희망했다. 제발 그가 내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기를. …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이 죄목이 너무나 낯익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행해졌던 판에 박은 재판들과 1930년대 소련에서 행해졌던 사전 각본에 의한 요식적 재판을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혼란과 분열, 재편과 충돌의 시대를 살아야 했고 시대의 문제에 대응하였으나 끝내 비정한 권력의 비열한 음모와 무치의 배신을 겪고만 시인. 시인은 남으로부터도 북으로부터도 버려졌으나 시인의 시는 탄생 100주년이던 2012년에 아들 시인 설희관이 『설정식 문학전집』을 간행하여 우리에게 어떤 소망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