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김충영 논설위원]
“평생 오직 서예 한길만 걸어왔습니다. 마지막도 서예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것이 소망입니다.”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심사위원장과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세계서예 전북 비엔날레 조직위원, 비엔날레 공모전 심사위원장, 한국서예박물관장...
서예가 근당 양택동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이다.
1949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한약방을 가업으로 이어오던 집안의 12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조부에 이어 부친 또한 한학자(漢學者)이자 한의학자였다. 소년 양택동은 자연스럽게 선대의 영향을 받아 한학과 서예와 함께 성장했다.
부친은 가업으로 이어온 한약방을 이어가기를 원했으나, 서예에 매료된 양택동은 한약방에서 일하는 것보다 서예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서예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서예를 택한 대가로 부친과 10여년간 연을 끊고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그가 집을 나가자 낙심, 한약방 도구와 약장 등을 모두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한약방을 접었다.
부모님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한학과 서예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택동은 조부와 부친 밑에서 서예를 익혔기에 독학의 길을 걷기로 했다. 서울에 올라온 후 어느 날 친구로부터 수원의 어느 서예학원에서 강사를 찾는 곳이 있다며 가보기를 권했다. 이렇게 하여 수원에 내려와 ‘수원 사람’이 됐다.
처음으로 자리잡은 곳은 수원 종로사거리 근처 상가 2층 동방서예학원이었다. 이 무렵 서예에 매진한 결과 24세 때인 1973년, 대한민국 국전에 ‘송풍각시’를 출품해 입선했다. 이후 부친은 근당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근당은 수강생을 지도하면서 서학(書學)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자 했다. 당시 중국과는 수교가 이뤄지지 않아 갈 수 없게 되자 대만으로 향했다. 틈만 나면 대만으로가 고서를 감상하며 머물렀다.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고서수집이 시작됐다.
당시 대만의 유명한 서예가들을 만났는데 당대 저명한 서법가(書法家)인 이초재, 장송령, 간현충, 이수아 선생들과 서법에 대한 문답 및 서전(書展)을 통해서 자신이 택한 길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1977년과 1978년에도 국전에 도전해 입선했다. 1978년(당시 28세)에는 대만의 유명한 서법가(書法家)들과 서법교류회를 갖고 현장휘호도 했다.
1992년에는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중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1994년 중국 서안서법 비엔날레의 요청으로 참가하여 출품했다. 한편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석 심붕, 위천지 등을 비롯한 저명 서법가와 현장휘호도 즐겼다.
1996년에는 중국 항주에서 중국미술학원 교수 왕동령, 진진렴, 축수지, 한천옹 등과 ‘서법연토회’를 가지기도 했다.
중국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서예의 보고였다. 당시 중국은 아직 유물에 관심이 없던 시절이라서 유명한 서예가들의 작품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때로는 가훈을 써주고 작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국·내외 서예작품이 수집되어가고 있었다.
서예에 발을 디딘지 30년이 지나면서 한국서예계의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 한국서예협회, 한국서가협회, 한국서도협회로 사분오열로 갈라진 실정이었다.
이러다보니 그럴싸한 박물관하나 없는 실정이었다. 한국 서예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우선은 그동안 수집한 서예유물과 자료가 수천 점에 달했으므로 인류의 유구한 역사문화유산인 서예 분야를 한곳에 모아 ’한국서예박물관‘을 건립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만난 사람은 고 심재덕 수원시장이었다. 심 시장은 취지를 설명 듣자 수원시 관계자들에게 만석공원에 건립한 재활용센터를 서예박물관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검토시켰다. 내부적인 검토를 끝내고 박물관 건립 승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해당 기관이 유물수장고는 물론 시설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며 불가판정을 내림에 따라 무산됐다.
당시 사정을 안타까워했던 사람은 수원시의회 홍기헌 의장이었다. 홍 의장의 주선으로 심재덕 시장의 뒤를 이은 김용서 시장과 면담이 이루어졌다. 김 시장은 “100만의 도시에 박물관 하나 없는 것을 아쉬워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며, "근당 선생의 유물을 수원시에 기증하면 서예박물관 건립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그동안 수집한 유물 5700점을 2003년 5월 7일 수원시에 기증을 했다. 당시 가격으로 30억원 상당의 유물을 기증했다고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했다.
곧 서예박물관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돼 박물관 건립에 따른 절차에 들어갔다. 제일먼저 박물관 명칭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는데 수원시는 ‘수원서예박물관’ 명칭을 제안했다. 근당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건립되는 서예박물관이므로 상징성을 위해 ‘한국서예박물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 ‘한국서예박물관’으로 확정하고 2008년 10월 1일 개관했다.
<다음은 근당 선생과의 일문일답>
▲ 오늘이 있기까지 쉽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어떤 일념으로 살았는지?
-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가업인 한약방을 이으라는 부모님의 바램을 어기고 서예를 공부하기 위해 집을 나서며,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로 ‘자강불식(自强不息)’을 되뇌며 방에도 이 말을 써서 붙이고 살았다.
▲ 그동안 칼럼을 통해 서예 관련 고전을 소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
- 1980년대 이후에는 집필활동에 열중했는데, 서예잡지 월간서예를 통해 ‘예술가 오창석’을 주제로 10회에 걸쳐 연재했고, 이어 ‘근 삼백년간의 중국서학’ 이란 주제로 1년에 걸쳐 연재했으며, 경인일보에 ‘근당의 고전산책’을 5년간 연재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경기문화나루에 ‘근당의 인문학 고전산책’을, 경기신문에 ‘근당의 고전’을 350회 연재했다. 수원일보에도 3년간 ‘근당의 인문학고전’을 연재한 바 있다.
2000년대 들어와 서예잡지 월간서예를 통해 ‘애국의 창’이란 주제로 한국 애국지사 등의 정신을 5년 가까이 연재해 서예인들에게 애국혼을 더하게 했고, 월간 미술잡지 아티스트에 ‘중국 문화의 뿌리’란 제목으로 6회에 걸쳐 집중 연재했다.
현재는 경기언론인클럽 잡지에 ‘근당의 시사고전’을 연재하고 있으며, 중부일보에 ‘근당의 고전산책’ 연재를 준비하고 있다.
▲ 서예계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 1984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 이후, 1990년, 1991년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으로 연임 위촉됐으며, 그 뒤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심사위원장과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세계서예 전북 비엔날레 조직위원, 비엔날레 작가 선정위원, 비엔날레 작가 그랑프리 심사위원 및 비엔날레 공모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한편으로는 후학 지도에도 열중했다. 전주대학교에서 명작 감상 등을 주제로 2년간 강의했으며, 법무부, 언론인재단, 서울변호사회와 경향각지의 여러 대학에서 인문학 강좌를 갖기도 했다. 또한 20여 년간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서예수업을 지도 중에 있다.
2008년 한국서예박물관 개관과 함께 박물관장으로 근무하면서 서예지도를 계속하고 있다.
▲ 호 근당(槿堂)은 누가 지었고, 삼무재인(三無齋人)은 어떤 뜻인지?
- 근당은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울 때 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셨다.
한의 가문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유달리 서화와 금석(金石)을 좋아해 일찍이 육조(六曹)의 조상과 장맹룡비, 지영천자문, 안진경, 미불, 황산곡 및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까지를 직접 사사한 스승 없이 홀로 서예대가들의 글씨를 습작을 통해 공부했다. 즉, 사(師), 체(體), 법(法) 없이 공부하는 서실(書室)이라는 의미에서 50이 되면서 삼무재(三無齋)로 지었는데 이후 삼무재인(三無齋人)을 쓰고 있다.
근래 들어서 노택(老澤), 반촌거사(半村居士), 부수(涪叟)등도 사용하고 있다.
▲ 한국서예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당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예가 800여명으로부터 작품을 기증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 2008년 한국서예박물관이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열게 됨은 1천만 서예인들이 학수고대하던 일이었다. 한국서예의 성지를 출범시키면서 전국에서 활동하는 서예대가들에게 호소했다. 대한민국의 제1호 한국서예박물관의 개관을 축하하는 의미로 영원히 소장되고 기록될 작품을 기증해줄 것을 호소한 결과 800여명이 기꺼이 작품을 기증해주었다. 이는 나의 60평생에서 가장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시 한국서예박물관에 작품을 기증해주신 서예작가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그동안 많은 휘호작품(비문과 제호, 현판)을 써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썼다. 대략 200여 작품이 넘을 것으로 알고 있다.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열거하면, 삼일운동기념비문, 전국 사찰의 대웅전 현판, 주련 등을 썼다. 천년고찰 청송 보광사 국보 극락전 주련휘호, 산청 송덕사 소장 금박 금강경 14폭 병풍이 있고 대종중 가문의 비문 등을 썼다.
현판은 전국 각지의 유적과 정자 등을 썼다. 그중에서도 수원시 관련 작품을 많이 썼다. 팔달산 서장대와 팔달문, 여민각, 성신사, 팔달문 중건, 수원한옥기술전시관, 우화관 상량문을 썼고, 화성행궁 전각 현판, 서호 항미정, 성신사, 여민각, 화성박물관, 정조테마공연장, 팔달문화센터, 여민각 범종 명문, 일월수목원 정자, 영흥수목원 정자 현판(동락정, 덕화당), 일월수목원 정자(일월재, 다산정), 중국 제남시 수원공원 신풍문 현판 등 많은 작품을 썼다.
또한 책자 제호를 여러 개 썼으며, 화성문화제 행사에서 대붓 퍼포먼스 등 서예관련 많은 작품을 남겼다.
▲ 앞으로의 계획?
- 나의 일생은 서예로 시작해서 서예로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다.
불가 어느 고승에게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이냐고 물으니 ‘공부하다 저 세상 가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도 저세상 가는 날까지 공부하고, 후학들과 함께 살아갈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