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93)] ‘유소유(有所有)’ ‘무소유(無所有)’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시의 정경이 우리 범속한 삶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시인의 삶이나 시인이 직면한 현실이 우리와 다르고 시인의 욕망도 우리의 욕망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만, 우리는 시에 감동하면 그런 생각을 무심코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쁘지 않지만.

 

창유리 한복판을 노린재가 기어오른다

유소유 허허벌판 무소유 뿔 세우고

앞발로 길을 내면서 뒷발은 길 닫으며

                 - 「앞발로 뒷발은」/김양희

 

 이 시조의 초장에서 제시된 대로 한 ‘노린재’가 ‘창유리’를 ‘기어오’르는 장면을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번 보았었고, 혹 아직 못 본 독자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볼 개연성이 있다. 새삼스럽지만 누구나 보았거나 볼 수 있는 그런 정경에서 시인은 자신이 연계된 화자로 하여금, 중장과 종장에서 보듯, 우리와 다른 생각을 표명하게 한다. 즉 시인의 시선과 연상이 우선 우리와 다르다. 사실 자체를 주시하며 우리가 주로 그 성격과 이해를 따지려 하는데, 시인은 진선미에 관련된 성찰을 하거나 단서로 하여 비유와 상징의 시선으로 사실을 바라보며, 그 상기된 생각을 잘 정제해 표현하기를 좋아하고 잘 한다.   

 각설하고, 우리는 ‘노린재’가 ‘창유리 한복판’을 ‘기어오’르는 정경을 보다가 뜻밖에 문득 전시되는 전환 국면을 괄목하게 된다. ‘유소유’의 ‘허허벌판’을 그 ‘노린재’가 ‘무소유’를 표방하는 ‘뿔’ 우뚝 세우고 힘겹게 씩씩하게 걸어 오르고, 오르는 모습을. 또 동시에 ‘유소유(有所有)’ ‘무소유(無所有)’ 문제, 우리 인생의 한 고착된 본질, 되도록이면 외면하고 싶은 그 난제를 그만 화두로 만나고야 말았다.  

 새삼스럽지만 인류는 중도(中道)에서 이탈한 과도(過度)한 ‘유소유’의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유혹되면서 살상(殺傷) 전쟁도 일으켰고, 곧 서로 그 비참과 불행을 절감하면서 평화와 소통을 더없이 소중하게 품고 품었다가, 적당한 가짜 명분으로 이끄는 세력의 선동을 따르며 그 비극을 반복하고 있지 않나.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을 무슨 진영으로 나누어 다투게 하는 그 한 주요 원인도 결국 이 화두에 관련되어 있지 않나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의외였긴 하여도 이 문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는데, 그 관련 메시지는 기존과 다르다. 종장에서 ‘노린재’가 ‘앞발로 길을 내면서 뒷발은[뒷발로는] 길 닫으며’ 가고 있다고 한다. 말해 무엇하랴만 서로 다른 ‘앞발’과 ‘뒷발’ 행위의 뜻은 둘 다 분명 ‘노린재’의 의지가 아니라 화자의 의지에서 발출된 화자의 연상이다. 그런데 ‘앞발로’ ‘무소유’의 ‘길을 내면서’는 이해가 금방 가능하지만, ‘뒷발은 길 닫으며’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어렵게, 어렵게 개척한 그 ‘길’을 ‘뒷발은’ 굳이 ‘닫’아 버린다고? ‘앞발로 길을 내’는 까닭은 자신의 그 신념 시행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과 후인들도 이 ‘길’을 참고하며 따라 오시라는 개척과 인도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자가 무슨 의도로 왜 그런다고 하는지 고려해보아야 한다. 아니 화자 너머 시 바깥에서 시인은 공손한 태도로 우리로 하여금 모색의 생각을 하게하며 자신의 의도를 양해해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우리는 우선 이 시의 의미 구축에서 대조가 잘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중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소유 허허벌판 무소유 뿔 세우고’. 즉 여기서 ‘유소유’와 ‘무소유’가 대등하게 맞서며 성격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또 ‘유소유 허허벌판’에서, 그냥 ‘소유 허허벌판’이라고 해도 될 텐데 ‘유소유’라고 언급하고 있어, 이 소위(所爲)도 한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자수율 형식을 배려한 시도만이 아니라 그 자체도 좋지만 보다 정연하고 확실한 대조를 이루기 위한 조어(造語)에 가깝다. 다시 말해 ‘소유의’도 아니고 ‘유소유’는 ‘무소유’에 최상으로 부각되는 그 상반되는 대조이다. 이 조사(措辭)는 작지 않은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허허벌판’과 ‘뿔’도 또한 가로 세로의 대조에 관련된 정제된 선택 표현이라 하겠다. 

 문제의 종장, ‘앞발로’ ‘길을 내면서’와 ‘뒷발은’ ‘길 닫으며’도 그 일환으로 주목하며, 동시에 이러한 일관 관철 대조를 이 시의 한 성취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왜 ‘뒷발은 길 닫으며’라고 하는 건지, 행간에 잠재되어 있는 화자의 의도를 발견한다면, 이 시 메시지의 여운을 잘 음미할 수 있어 금상첨화라 할 수 있겠다. 그 모색은 우리 독자 각자의 몫. 이 시를 거론한 책임을 지려고 부득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졸견을 여러분께서 모색에서 참조하신다면 감사하겠다. 

 ‘노린재’의 행보에 ‘무소유’의 의의를 부여한 화자는 짐짓, 이러한 ‘노린재’처럼 당신도 그런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그 길을 개척하고 또 과감하게 봉쇄하는 마무리가 어떻겠는가. 뜻이 같더라도 남이 간 그 길을 그대로 따르려 하지 말고, 각자 사정에서 그 길을 홀로 만들고 다른 미련 없이 지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지와 실천이 유종의 미를 거두는 ‘무소유’의 모습, 그 완결된 모습이 아니겠나...  

 이 시의 종국을 어떻게 해석하여도 한편 우리는 그 여운 음미 이후에는 영끌 운운하는 이 현실에서 과연 ‘무소유’를 시도할 수 있을지 의아해질 것이다. 이 시에서 이미 지시되었듯 ‘무소유’의 길은 수직 절벽(‘창유리 한복판’)을 기어올라야 하는 지난한 길이다. 화자의 개결 장렬한 기개를 존중하고 성원하면서도 실제 현실에서 그럴 수 있을지 또 연속 실천할 수 있을지 회의할 것이다. 아마 화자라면 몰라도 이 시를 쓴 시인도 우리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에 출현하는 소망이나 그 이행은 같이 진선미를 기리자는 기원(祈願).

 그런데 이 시의, ‘뿔‘을 곧추 ‘세우고’, ‘창유리 한복판을’ 꾸준하게 ‘기어오’르는 한 ‘노린재’의 의연한 모습, 평범하지만 비상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이미지를 뇌리에 각인하고, 다른 ‘무소유’ 이야기도 참조하며 생각을 거듭하는 독자는, ‘유소유’ 일방에 그저 매몰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견제하며, ‘무소유’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중도를 모색해볼지 모른다. 어쩌면 ‘유소유’에 매진하는 길도 알고 보면 숱한 무리와 거역의 부조리를 무릅쓸 수밖에 없기에 결국 의아해하며 회의할 수밖에 없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유소유’의 차원이 길이 없는 ‘허허벌판’이라고 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