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26)] 진순분 '사람의 꽃'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사람의 꽃

                           진 순 분

 

광교산 오솔길에서 가끔씩 만나는 얼굴

뇌졸중 젊은 아내를 부축하며 걷는 남편

명치 끝 애이불비哀而不悲는 먼 산으로 비껴놓고

고행하듯 순례하듯 가는 길 느리지만

따뜻한 차 한 잔을 먹여주며 미소 지을 때

낮달도 그냥 멋쩍어 나무숲에 숨어 본다

가야 할 산봉우리는 아직 멀고 험한데

사랑을 다 주고도 모자라서 안타까운

그 마음 웅숭깊은 곳 저 숭고한 사람의 꽃

 

광교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수원 사람들에게는 축복 중 하나이다. 집 근처 밋밋한 동산을 오르는 일은 왠지 싱겁고 그 이름도 거창한 백두대간의 무슨 산이니 하는 명산을 찾는 일은 거기까지 가는 일도 번거롭고, 오르기가 버거울 때 그래도 제법 등산을 했다고 뿌듯해할 만한 산이 광교산이 아닌가. 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느긋이 올랐다가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 짧은 가을 해가 서쪽 저만치 걸려 있지만 산 아래 자리한 식당에서 도토리묵 한 접시에 막걸리 한 병을 비울 시간은 충분하다. 또 심심찮게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서 함께 어울리는 날은 해가 다 진 다음에야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는 일도 다반사이다.

시인이 정성스레 서명을 하여 준 오래 된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는 일도 그 재미가 제법 재미지다. 위의 시는 진순분 시인이 2014년에 펴낸 시조집 『바람의 뼈를 읽다』에 들어있는 ‘사람의 꽃’ 전문이다. ‘광교산 오솔길에서 가끔씩 만나는 얼굴’이라 한 것으로 보아 시인도 자주 광교산을 찾는 눈치이다. 전체 9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조는 굳이 그 정형적 틀만 따지자면 1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3행까지만 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가끔씩 만나는 얼굴’은 ‘뇌졸중 젊은 아내를 부축하며 걷는’ 남편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젊은 아내이다. 젊은 부부는 아픔을 겉으로 드러낼 수도 없다. 명치 끝이 저리는 아픔을 애이불비, 슬퍼도 슬퍼하지 않는 눈빛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 먹먹한 뻐근함이 이내 따뜻한 차 한 잔이 되어 우리네 가슴으로 스민다. ‘고행하듯 순례하듯 가는 길 느리지만/따뜻한 차 한 잔을 먹여주며 미소 지을 때/낮달도 그냥 멋쩍어 나무숲에 숨어 본다’고 했다. 

병마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나선 산행이다. 비록 느리지만 순례를 하듯 걷는 경건한 걸음이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적으로 더 고통스러운 이는 젊은 아내이다. 어쩌면 남편에 대한 감사 못지않게 미안함도 크리라. 그런 고통과 마음을 아는 남편은 아내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먹여주며 미소’를 짓는다. 사람의 지극한 정성에 자연도 감응한다. ‘낮달도 그냥 멋쩍어 나무숲에 숨어 본다’

봄날의 흐드러진 꽃만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가을의 꽃은 가을의 소슬함과 뚜렷이 대비되는 따뜻함이 있다. 광교산을 오르는 산행길에도 이름 모를 수많은 야생화가 저가 피어야만 하는 저마다의 이유로 흔들리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유로 피는 꽃이 ‘가야 할 산봉우리는 아직 멀고 험한데/사랑을 다 주고도 모자라서 안타까운/그 마음 웅숭깊은 곳 저 숭고한 사람의 꽃’이다.

시는 굳이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시는 그 어떤 가르침의 말보다 은연중에 더 큰 성찰의 실마리를 준다. 

날이 갈수록 각박하다. 만나기도 쉽게 만나고 또 쉽게 헤어진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장 불행한 시대로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불행하다고 느낌은 우리가 스스로 지은 동아줄에 불과하다. 작은 사랑으로도 그 견고한 묶음을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꽃이다.

진순분 시인

1990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집 『돌아보면 다 꽃입니다』 외 다수

윤동주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