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하면 좋은 일들이 많습니다.
공동체가 지니는 힘 중에 최고의 힘이 더불어 살게 되면서 치유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우울증 걸렸던 젊은이들이 3개월 함께 살며 노동하여 치료가 됩니다.
노이로제가 심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두레마을에 들어왔던 의과대학생이 회복되어 복학하여 지금은 훌륭한 의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버리고 가다시피 한 할머니가 마을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어머니는 들에서 일하게 되어 협업이 이루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두레마을에서 유정란 일만 마리를 먹여 계란을 낳게 되어 용달차에 싣고 아내와 함께 아파트 단지에 팔러 갑니다.
압구정동 아파트로 가서 계란을 팔고 있는데 어떤 부인은 나를 자세히 보더니 "그 어른 김진홍 목사 닮았네." 하기에 내가 "닮은 사람도 있겠지요." 하였더니 "아니 목소리도 닮았네." 하며 "혹시 형제 중에 김진홍 목사 없어요?" 하고 묻기까지 합니다.
가장 힘들기는 남양만에서 유기농으로 지은 쌀을 팔러 갔을 때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는 괜찮은데 반포에 가면 5층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5층으로 등에 지고 올라가노라면 80키로 한 가마니가 무거워 도중에 꼬꾸라질 듯합니다.
그런 고비 고비를 넘기며 두레마을 공동체는 조금씩 성장하여 갔습니다.
두레마을 소문이 퍼져 나가자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식구가 점차 늘어나 15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만한 숫자가 한 솥에 밥을 먹으며 너 것 내 것 없이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루는 30대 초반의 자매가 보퉁이 하나 들고 찾아왔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데 남편 되는 자가 폭행이 심하여 맞다가 맞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두레마을 소문 듣고 찾아 왔노라 하였습니다.
사정이 딱하게 여겨져 방 하나를 배치하고 양계장에서 일하며 지나게 하였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남편에게 다녀오더니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 돌아왔습니다.
그간에 이미 다른 여인이 자기 자리에 들어와 살고 있더라면서 혼인 신고도 하기 전이라 지긋지긋한 남편에게서 완전히 해방되게 되었노라면서 기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양계장에서 일하게 된 지 일 년여가 지난 뒤 양계장 책임자인 총각과 함께 와서 결혼하겠으니 허락해 달라 하였습니다.
나는 기꺼이 허락하며 일러 주었습니다. 남자 쪽도 정직하고 성실한 남자이고 여자 쪽은 험한 시절 보내며 성숙된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니 둘이 서로 이해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살라 격려하여 주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