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94)]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우리는 꿈을 꾼다. 어떤 꿈은 꾸었어도 잠에서 깨어나면 꾸었는지도 모르게 거의 기억이 없고, 어떤 꿈은 잠에서 깨고 나서 더욱 생생하고, 그런 꿈도 어떤 꿈은 쉽게 잊혀지고, 어떤 꿈은 오래 기억되기도 한다. 다음 시에서 제시되는 꿈은 현재화된 ‘십 년 전’ 꿈. 시 문맥에서도 이런 꿈은 드물다고 하겠는데, 그간 화자의 의식과 모종 추회(追懷)의 이면에서 간헐 지속되었다고 하겠다. 더욱이 화자가 꿈에서 본 자신은 죽어 있었다. 죽은 자신, 살아있는 죽은 자신이 ‘환’하고 ‘가벼’워져 ‘봄날의 냇가’를 배회하다 그 무엇을 보는 것을 화자도 본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 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도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 「파란 돌」/한강

 

 차분하고 세심한 서사 같은 정연한 전개가 우리의 독해를 잘 인도하고 있지만 화자의 세 시각을 고려하며 경유하여야 이 시에 조성된 차원에 무난하게 들어설 수 있다. 꿈속에서 ‘냇물 아래’ ‘파란 돌’을 보고 ‘팔 뻗어 줍고 싶었’다가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고 급기야 깨달았던 죽었던 자신의 돌이킬 수 없었던 ‘아팠’던 시각, 그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꿈에 흘린 눈물’을 확인했던 시각. 그리고 십 년 지나 그 두 시각을 상기하는 현재의 시각이다.  

 이런 점검을 시도하는 이유는 6연 ‘난 눈을 떴고,/깊은 밤이었고,/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가 그 이전 정황으로 소급해서도 강렬하고, ‘십 년 전’ 그 꿈을 깬 직후의 상태에도 국한되지 않으며, 나아가 그로부터 십 년 지난 작중 현재에도 그 여운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의 이러한 ‘파란 돌’ 경사(傾斜)에서, 화자의 이 꿈은 옛 꿈이 아니라 현재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문제로 이어지는, 지속되는 불망(不忘)의 미수(未遂). 다만 그때와 달리 밀도가 줄었고 결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러니까 ‘십 년 전 꿈에 본/파란 돌’은 현재에도 화자와 불가분리의 존재이면서도 화자와 무관하게 여전히 스스로 실존하는 미지의 사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그 ‘파란 돌’은 ‘파르스름해 더 고요’한 자태일 뿐 아니라, 화자에게 ‘해 맑’고 ‘희고 둥근’ 세 ‘조약돌’로 보이기도 한다. 이 현상은 다시 말해 우리가 괄목한 대로 화자가 그 꿈에서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배회하다가 죽은 자의 시선으로 ‘냇물 아래’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리. 우리는 이 유심(幽深)하고 미려(美麗)한 몽환(夢幻)에 탄식하며, 탄식을 마치기 전에 화자의 이 꿈을 하나의 사실로 보게 되는 듯하다. 그 마주하는 태도가 너무 진지하고 투명해서인가. 

 우리는 ‘난 눈을 떴고,/깊은 밤이었고,/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를 다시 읽고, 화자의 눈가에 글썽글썽 고였다가 흐르는 그 눈물을 ‘따뜻’하게 감촉하는 듯한 기분과 정조로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화자의 재생(再生) 의지를 침묵으로 성원하게 된다. 또, 꿈에서 깨기 전에 있었던 의외의 그 자각에 화자가 ‘그때 처음 아팠네’라고 하였었는데, 우리는 좀 머뭇거렸다가 곧 그 토로와 심정도 사연과 사정이 없었어도 우리 자신을 동정하듯 화자를 동정하며 공감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초두에서 읽은 ‘아, 죽어서 좋았는데’와 ‘환했는데 솜털처럼/가벼웠는데’에서의, 화자의 그 사(死)에의 미련과 집착을 마냥 외면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우리는 죽어야 볼 수 있고, 죽은 이로 하여금 줍고 싶게 하며, 그것을 주우려면 사에서 생(生)으로 회생해야 한다는 기사회생(起死回生) 관련 그 ‘파란 돌’을 다시 주목하며, 재생의 의지로 이월해온 화자의 궤적을 상기하고 사의 영역에서 생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7연 이후는 1연처럼 그 십 년 후 작중 현재의 이야기이다. 그 두 상황을 회고하며 화자는 자신이 ‘그동안’ ‘파란 돌’을 ‘주운 적 있’었는지, 그러다가 ‘놓친 적 있’었는지, 아니라면 ‘영영 잃’었는지, ‘새벽’ ‘선잠 속에 스며들던’ ‘푸른 그림자’였는지,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 어떻게 분명하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어느 경우인지 추정해보고 싶다. 그 이유와 더불어. 네 번째가 아닐까. 이후 ‘새벽’ ‘선잠 속에 스며들던’ 설핏한 ‘그 푸른 그림자’  

 어쨌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 시각이 연계되면서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꿈에 흘린’ ‘따뜻한 눈물’일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용납하고 포용하는 ‘따뜻한 눈물’. 그리고 그 ‘파란 돌’을 줍고 싶다면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재생의 메시지일 것이다. 말해 무엇하랴만 생의 단순한 연장이나 갱신이 아니라 그 경신이나 개신.  

 이 시를 쓴지 대략 십 년 후, 지난 10월 10일에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강이 2024년 문학부문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이 세계에 전파되었다. 꿈속이 아니라 꿈밖 현실에서 그는 ‘봄날의 냇가’를 ‘환’하고 ‘가벼’이 소요하다가 ‘냇물 아래’ ‘파란 돌’, 그 돌의 ‘눈동자처럼 고요’한 그 돌을 드디어 주워들었다고 하겠다. 

 삶이 어둡고 무거워, 죽으면 ‘환’하고 ‘솜털처럼/가벼’워질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시에 자신의 사연과 사정을 대입하고, 한 번 더 읽었으면 한다.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도 이 시는 우리에게 시사한다. ‘파란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