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27)] 송유나 '어머니의 놋화로'
어머니의 놋화로
송 유 나
익숙한 그 자리다 오랫동안 함께 했어
손때 묻은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마지막 가야 할 자리 눈 여겨서 봐뒀어
어머니가 남겨주신 베란다에 놋화로
주름진 자리마다 검버섯이 피어나듯
놋 속에 스몄던 화가 거무죽죽 올랐다
한쪽으로 밀어놨던 지문도 다 지워진
이름도 잊혀져간 연안김씨 김 아무개
무수한 생각에 젖어 길을 잃고 서 있다
세상이 바뀌다 보니 차례나 기제사에 지방(紙榜)을 모시고 지내기보다 영정 사진을 올려놓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잊지 않고 모시면 다행이다.
차례나 제사를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기제사 때의 지방이 가끔은 가슴을 더 먹먹하게 할 때가 있다. 현비유인(顯妣孺人)으로 시작하여 본관과 성씨를 적은 뒤에 신위(神位)로 끝나는 어머니의 지방이다. 어찌 이름 석 자가 없었겠는가마는 보통은 어려서는 아무개네 딸, 출가해서는 무슨 무슨 댁 그리고 이어서는 아무개의 엄마로 이름 없이 살다가 가셨기 때문일까.
그래도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은 결코 적은 게 아니다. 우리네 육신만 주신 게 아니다. 우리가 평소 갖게 되는 마음가짐은 평생 온몸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에 그 뿌리가 있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어머니의 유품 하나를 대할 때에는 손길보다 마음이 한발 먼저 그곳으로 향한다.
위의 시는 수원에서 발행하는 유일한 전국규모의 시 계간지 『한국시학』 2021년 여름호에 송유나 시인이 발표한 ‘어머니의 놋화로’ 전문이다. 전체 3연으로 되어있는 연시조의 형태이다. ‘익숙한 그 자리다 오랫동안 함께 했어/손때 묻은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며/마지막 가야 할 자리 눈 여겨서 봐뒀어’라며 1연에서는 어머니의 유품들 즉 ‘손때 묻은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오랫동안 함께 한 당연히 익숙한 것들이다.
2연에서 시인의 눈길은 베란다에 내어놓았던 놋화로로 향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화로는 겨우살이에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었다. 보온이 제대로 안 되는, 위풍이 코끝을 얼얼하게 하고 손가락마저 굳어 곱게 만드는 방에서 화로는 그 손가락을 펴주는 유일한 발열 기구였다. 화로는 단순히 온기만 전달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우리 4형제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고구마를 구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의 장이었으며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흘러나오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담겨 있는 요술 단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화로를 보관하고 유지하는 노동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시인도 ‘어머니가 남겨주신 베란다에 놋화로/주름진 자리마다 검버섯이 피어나듯/놋 속에 스몄던 화가 거무죽죽 올랐다’라며 유품 중 놋화로를 통하여 어머니를 회상한다. 놋화로에 슨 푸른 녹이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피었던 검버섯과 너무나 닮았다.
아, 그 어머니의 생은 어떤 길이었을까. ‘한쪽으로 밀어놨던 지문도 다 지워진/이름도 잊혀져간 연안김씨 김 아무개/무수한 생각에 젖어 길을 잃고 서 있다’ 군불을 때고 남은 숯과 재를 담고 내다 버리기를 수백 번 그리고 그 놋화로를 닦고 또 닦으시면서 묻었을 수천수만 개의 지문들, 이제는 ‘지문도 다 지워진/이름도 잊혀져간 연안김씨 김 아무개’가 시인의 어머니이시다. 그렇기에 시인은 ‘무수한 생각에 젖어 길을 잃고 서 있다’라고 했다. 그 어머니가 아니 계시기에 우리는 길을 잃은 미아이다.
오늘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이니 보름 후면 겨울로 들어가는 입동이다. 기후의 이변과 관계없이 겨울은 겨울이다. 겨울은 춥다. 비록 지금은 이 지상에 아니 계셔도 그 화롯가에 어머니와 함께 부젓가락 엇갈려 놓고 그 위에 된장찌개 뚝배기 하나 올려놓고 싶다. 모진 계절 한때를 이겨낼 화로 하나 마음속에 미리 준비해두어야겠다.
송유나 시인
2008년 『월간문학』 등단, 설록차문학상, 경기시학상 등 수상
심리학 박사. 사회복지학 박사.
현) 심리학 및 사회복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