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를 이끌던 야히야 신와르(62)가 지난 10월 16일(수)에 가자지구의 한 부서진 건물에서 “악마의 얼굴”이라 저주하던 이스라엘군의 탱크 포탄에 폭살되었다. 이미 부상당한 채, 조롱하듯 염탐하는 드론에 막대기를 던지며 저항하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차이와 처지를 더욱 선명하게 보았다. 아이들을 포함 4만 여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되고 가자의 도처가 유린된 상태에서 신와르까지 피살되자 미국 등 주요국들이 휴전과 종전(終戰)을 기대한다는데, 이스라엘은 하마스 완전 궤멸이 목표라고 단언하고, 하마스의 알카삼여단은 “위대한 순교자 산와르를 향해 행진하겠다.” “신을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길에서 이슬람 전사들과 함께 순교하고자 피를 흘리자.”고 맹서하고 있다.
아무래도 지상의 무상한 고뇌도 거듭할 그들과 함께 최근 한 기사에서 소개된 다음 동시를 읽고 싶다. 작중에 등장하는 ‘저 먼 하늘나라’는 바로 ‘천국’이고, 크리스천 소녀 시인이 기리는 이 ‘천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같이 기리는 그 ‘천국’이며, 그 주재자 역시 같은 하나님이다.
새까만 굴뚝으로
지나왔으면서도
새하얀 너는 대체
무슨 요술을 썼지?
가만 가만 굴뚝에서
나오자마자
사라져버리는 너는
참 좋겠다.
바람의 날개 타고
저 먼 하늘나라
훨훨 올라가서
구경할 테니까...
‘85.2.13’
- 「연기는 하늘로」/이승영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오랜만에 문득, 사무사(思毋邪) 시심(詩心)이 우리에게 전이되고 있다고 느끼며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저 먼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화자의 동심(童心), 우리는 어쩐지 거리를 의식하지 못하고, 낯설지도 않다. 그리고 어느새, 잘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욕망과 이기를 잊고, 잘 알던 타인의 그 작태도 잊고, ‘새까만 굴뚝으로/지나왔으면서도/새하얀’ ‘연기’를 화자와 함께 부러워하게 된다.
평소 천국을 구경하고 싶은 소녀 화자는 조숙하게도 지상의 이 세속을 조마조마한 ‘새까만 굴뚝’으로 본다. 사람의 삶은 그 속을 지나가는 과정이고 아무래도 ‘새까’매지는데, 그 속을 ‘지나왔으면서도’ ‘새하얀 너’, 즉 ‘연기’를 경이로워 한다. 그런데 이 찬탄에는 부러워하는 심정이 있고, 자신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심정도 있다. 그리고 그 ‘연기’가 ‘굴뚝에서/나오자마자’ ‘사라져버’린다고 하여, 우리에게 모종 여운을 남긴다. 화자는 ‘연기’가 그런 자신을 뽐내거나 우쭐대지 않는다고 하며 더욱 찬탄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 ‘연기’는 ‘바람의 날개 타고/저 먼 하늘나라’ ‘훨훨 올라가서/구경할’ 수 있다는 것인가. ‘저 먼 하늘나라’에서 산다고 하지 않고 ‘구경’한다는 언급에서 우리는 지상의 사정을 상기하며 화자의 동심에 더욱 젖어든다.
11살 때 이 동시를 쓴 시인은 스무 살이던 1994년 그해 10월에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그 30주년을 맞아 성수대교 아래에서 이 시와 같은 이름의 시집을 든 시인의 동생 이상엽씨는 당시에 누나가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이 신념을 형성하는 한 유력한 단초가 위 시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하겠다. 우리가 이 동시를 다시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시인이 교생실습을 하러 다리를 건너던 그때에도 지녔을 그 신념 실현에 관련된 입양, 이동도서관, 장학회, 해외 봉사 등 14가지 소원을 어머니 김영순씨와 동생이 거의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상 〈조선일보〉 10월 20일자 참조).
그 어머니와 동생이 ‘새까만 굴뚝으로/지나왔으면서도/새하얀’ ‘연기’가 되고자 한 시인의 지향을 잊지 않고 대신 실천하여, 이 시의 영역은 시에 국한될 수 없게 되었다. “성수대교에서 누나 잃었지만… 지옥에 살지 천국에 살지는 내 선택”이라는 동생 이상엽씨의 결단도 고귀하고 현명하다. 바로 누나의 유지(遺志)이기도 하리. 화풀이나 복수를 하지 않고.
이 동시의 여운을 음미하며 이스라엘에게 바란다. 가자와 서안지구의 장벽을 철폐하고 전쟁으로 점탈한 땅을 돌려주는 등 팔레스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선회하지 않고 그저 무력으로 보복 처변(處變)하기 만을 반복한다면 대책이 있는데도 외면한다고 하겠고, 이 비극은 끝이 없을 것이다.
‘새까만 굴뚝’을 새까맣게 새까맣게 지나오고, 그 현상 변경 없다면 계속 그래야 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래서 이스라엘이 먼저 ‘새하얀 너’가 되는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면 그저 무미하기만 한 것인가. 한편, 위아래 국경에 장벽을 쌓던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하여 우크라이나 침략 전장 확대가 임박하고 있고, 그곳보다 한반도에 더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아니 그래도 역시 이 시를 같이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