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96)] ‘내 시혼(詩魂) 돌아와, 그대를 읊조릴 테니’
1638년 음력 8월 어느 날 경상도 안동 땅 천전(川前) 마을에서 병석의 한 선비가 자신의 임종을 의식하고 편지 형식의 시를 읊었다.
寄語溪堂一樹梅 시냇가 작은 초당 한 그루 매화여
好藏清艷待春回 그대 맑고 예쁜 본성 잘 간직했다가 오는 이른 봄을 기다려다오
開時且莫悲無主 그때 꽃, 꽃피우고서, 내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기를
定有吟魂月下來 그 차고 달 밝은 밤, 내 시혼 돌아와, 그대를 읊조릴 테니
- 「매화(梅花)」/김휴(金烋 : 1597-1638)
수신자가 인격이 아니라 매화라는 사실에 오히려 우리의 가슴이 서늘 뭉클해지고, 곧 사생(死生)을 달리할 별리의 정서가 역시 슬프고 슬프지만 과도하게 슬프지는 않다고 느낀다.[애이불상(哀而不傷)] 그러면서도 그 기분 점점 매화의 향기와 자태처럼 청아(淸雅)하고 염윤(艶潤)해지는 듯. 읽으면 읽을수록 어떤 독자는 매화와 시인의 전무후무한 교류에 혼융되어 진공에서 중력을 느끼듯 그 시공의 현장을 같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비상한 감정이입 몰입은 이 시의 결구 4행에서 반전 같은 전환을 계기로 조성되고, 시 전체와 음미에 고요하고 정결한 시내의 물결처럼 파급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의 행간에 함축된 사정과 뜻을 헤아리게도 된다. 시인은 매화에게 말한다. 나 이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해 다시 그대를 만나지 못할 사정이 지병보다 분명한데, 육신의 이승,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겠지. 하지만 내가 죽어도 내가 그대에게처럼 나를 잊지 못할 그대는 나처럼 시들지 말고 사나운 비바람과 저미는 서리와 모진 추위에도 그대의 본성을 잘 보전해 겨울 같은 이른 봄을 기다려 꽃으로 피우기 바란다. 그때 그런 그대를 바라보고 그대를 기려주는 내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기를. 나의 시혼, 나의 시혼이 그대가 나를 위해서 꽃 피웠다고 알고 차고 달 밝은 이른 봄날 밤에 반드시 그대에게 돌아와, 그대의 고아한 절개와 유려한 지조를 또 다시 노래하리라...
혼신의 진심을 다한 이 약속은 사생초월 정서로 보아 필연으로 도래할 예정된 미래라고 하겠다. 나아가 시인의 의지와 시혼은 380여 년 후세 우리로 하여금 이 시의 정황과 도래할 재회가 과거이면서도 현재와 미래라고 할 탄식을 일으킨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원인(遠因)으로 하여, 시인의 심정과 유사한 상념을 지닌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도 앞으로도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시인이 이 편지 시를 그 매화에게 부치게 하였건 그러지 못하였건 그 이전 두 존재의 지밀한 교감으로 미루어, 시인이 별세한 이듬해 이른 봄뿐만 아니라 매화는 해마다 꽃 피워 시인의 시혼과 영통(靈通)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시인은 기록 상 14세에 이미 ‘담박(淡泊)’과 ‘원향(遠向)’을 지향하는 첫 시 「모경(暮景)」(淡泊岫雲生[산봉우리 위로 구름 담박하고] 蒼茫野日暮[벌판도 뒤덮은 노을은 아득한데] 秋江一漁舟[가을 강에서 한 척 배] 遠向煙村渡[안개 낀 마을을 지나 멀리멀리 가려하네])을 짓고, 「황하부(黃河賦)」 100여 구를 짓기도 하였다. 이후 시인은 광해주의 정치와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등을 겪으며 왕도(王道)와 알력하는 시대를 개탄하며 유자(儒者)의 치국, 평천하의 길을 거의 외면하였으나 젊어 돌아간 아버지와 홀어머니를 위해 거업(擧業)을 단절하기 어려웠다. 병자호란 직전인 1635년에 과거에 응시하려고 한양에 왔다가 다음 시를 읊었다.
旅館人誰問 여관에서 누가 안부 물어 주랴만
閑庭草自新 한가한 뜰에서 풀 스스로 새롭네
雲深龍闕曉 동틀 무렵 구름 위로 궁궐 솟아 있고
花媚鳳城春 꽃들이 어여쁘기는 하네 한양성의 봄
投跡知何地 어디로 발길 옮겨야할지 알기는 아나
趨名笑此身 명예 좇는 이 몸이 우습구나
淸溪有鷗鷺 떠나온 맑은 시냇가 물새
歸去且相親 돌아가 서로 더 가까이 지내야하리
- 「여회(旅懷)」
여관 뜰에서 풀이 더 푸르러지는 모습을 스스로 새로워지는 일신(日新)으로 여기며 시인은 안부를 묻고, 낮은 그 풀과 도성의 궁궐 주변에 재배되는 울긋불긋한 꽃들을 대비하며 자신의 내심을 드러내고 있어 보인다. 6행에서는 급기야 자신의 과거 응시를 고소(苦笑)하고 회의한다. 7, 8행에서는, 아무튼 떠나온 고향 반변천으로 돌아가 구속 없이 자유로운 유유자적 물새들과 새삼 벗하며 지내기를 다짐한다. 5행에서 현재 방황을 얼핏 언급하였으나 시인의 지취는 이렇듯 아무래도 환로가 아니었다. 이 시에는 자조와 염세의 기미도 있다고 하겠다. 당시 조정의 편당(偏黨) 세도(勢道)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 시 작시 직후 과거의 전시(殿試)에서 시인이 제출한 대책문이 장원(壯元)으로 지목되었는데, 시지(試紙) 말미에 ‘謹對(근대)’ 두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여 낙방으로 처리되었다. 병환 중인 홀어머니를 걱정하다가 빠트렸다고 하는데, 이 추정을 그대로 따르기 어렵다.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모종 무의식의 소위(所爲)가 아니었을까.
시인은 말년에 아들 김학기(金學基)에게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명철보신(明哲保身)한다고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술 마시는 것만 일삼으며, 세상을 희롱하고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삶을 살아왔다”고 술회하였다.
하지만 시인은 시 486수를 남겼고, ‘근독(謹獨)’과 ‘불기(不欺)’를 지침으로 경서(經書)와 성리(性理)를 탐구하여 덕목들의 관계와 구조를 도설(圖說)한 『조문록(朝聞錄』과, 『도동록(道東錄)』 등을 실천을 강조하며 저술하였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서지학‧문헌학 저서인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을 각고 끝에 남기기도 하였다. 스승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 1554-1637)의 권유로 1616년 20세부터 시작하여 우리 선인(先人)들의 670여 종 문헌을 찬집해 분류하고 해제를 찬술하여 21년 후였던 1637년 음력 11월 16일에 완편하고 자서(自序)를 썼다. 그로부터 9개월 후 시인은 1638년 8월 24일에 향년 42세로 별세하였다. 이 희귀한 업적을 학계는 이 나라 후세 실학의 한 선하(先河)로 주목하고 있다.(안동시•한국국학진흥원, 『경와 김휴의 학문과 활동』(2024년 역사인물선양학술대회 논문집), 2024.10.22.)
참고로, 시인은 퇴계 이황(1502-1571)의 손서 김용(金涌 : 1557-1620)의 손자이며, 위 첫 시의 ‘계당(溪堂)’은 천전과 90여 리 상거한 예안 토계(兎溪) 가에 청년 시절 시인이 아버지 김시정(金是楨 : 1579-1612)을 이어 세워 공부하였던 정사(精舍) 한계당(寒溪堂)이다. 주지된 대로 퇴계는 매화를 예찬하는 여러 시를 지었고, 서거 직전에 “매화에게 물을 주라”고 유언하였다. 퇴계는 중국 선비들의 매화 전통을 이어 매화를 새롭게 조명하였는데, 자신이 개진한 성리학과 인간상의 한 상징으로 삼은 듯하며, 그 유언은 후학들에게 당부한 유촉일 것이다. 매화 같은 학문과 사람. 그렇다면 위 시와 더불어 한계당의 매화와 시인의 지향은 퇴계 학풍의 계승이자 그 한 심화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