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99)]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가을의 문틈에서’
지루한 가난과 고되기만 한 농사에 지쳐 막심하게도 아버지가 소 판 돈을 여비로 그 아버지와 고향을 떠나갔던 인물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두루 금의환향하였는데, 그와 같은 사람은 적고 다른 사람은 많다. 가출이야기. 가출에는 양면의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가족이나 집단으로부터 개체 분리인 이 행위는 자발(自發)이건 타발(他發)이건 거역 비슷한 당돌한 메별의 출분이고, 한편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애를 미지에 건 과감하고 무모한 용기의 부러운 모험이기도 하다. 우리도 이러저러 고향을 떠나왔지만 우리 주위에는 바로 그렇게 가출한 이가 있었고, 행방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다음 시는 후일담을 알 수 없었던 한 문제인물 ‘그’가 드디어 우리에게 근황을 적어 보낸 서신과 같다.
대문을 고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서성거릴 때
송곳니 같은 기억이 돋아난 곳에서
자전거와 늙은 집배원이 나란히 걸었다
마을 어귀를 굴리다가
해 질 녘을 깔고 앉은
그림자 둘
노을을 게워 낸 얼굴로
바스락거리는 시월이었다
쭉정이 같은 고향에서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바람은 쓸어버린 나뭇잎처럼 날리고
그는 낡은 대문을 박차고 떠났는데
어떤 통증은 일찍 도착했고
어떤 통증은 늦게 도착했다
위니펙의 집배원이 된 그는
걸어가 봐야만 알 수 있는 주소지에서
늙은 집배원의 발자국을 줍고는 했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가을의 문틈에서
순한 짐승의 눈빛이 되어
삐거덕 삐거덕
문을 고치고 있는 그는
강원도 홍천 은행나무 숲
늙은 집배원의 아들이었다
- 「두 집배원」 / 김수수
전지 시점의 화자가 주인공 출분자를 ‘그’라고 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묘사도 하고 있어, 서로 엄연히 구별되고 있지만, 이 시의 화자는 아무래도 작중 출분자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 시는 기실 화자의 자술(自述) 자전(自傳)인데, 화자가 자신을 대상 인물로 설정하고 객관과 분석의 형식을 적용하고 있어 보인다. 이런 기술 방식은 문학작품에서 적지 않다.
이 시 전체에 의의가 두루 파급되는 한 행의 첫 연 ‘대문을 고치고 싶다고 했다’는 우선 그의 출분 동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잘 유추하듯 이 심사는 물리 차원의 단순한 수선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대문’은 그가 소속한 ‘문호(門戶)’의 환유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란 뜻이 함축되어 있고, 그 ‘고치고 싶다’에 어려 있는 불만은 변화를 추동하여 모종 상승을 이루려는 희망과 같다. 어린 그는, ‘해 질 녘’에 지쳐 돌아오는 ‘늙은 집배원’ 아버지, 그 아버지와 아버지로 표상되는 문호가 싫어, ‘낡은’ ‘대문을 고치고 싶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수치도 근저로 한 그 의지를, ‘쭉정이 같은 고향에서/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6연)에서 더 잘 알 수 있다.
그는 떠났다. ‘바람’이 ‘쓸어버린 나뭇잎처럼 날리’는 어느 가을날. 고향에 기속되어 있는 불치의 질곡과 다르지 않는 아버지와 자신의 그 문호를 발로 차 일부 부수고, 그러니까 ‘낡은 대문을 박차고 떠났’다. 태평양 건너 멀고먼 캐나다, 캐나다로.
하지만 그 이후는 우리의 예상과 기대와 다르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희망과 너무 달랐다. 어느 날부터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집배원’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꽤 경력을 쌓았어도 아버지보다도 더 힘들게 ‘걸어가 봐야만 알 수 있는 주소지’를 찾아가곤 해야 했으며, 나아가 그런 자기인식과 ‘일찍’ 혹은 ‘늦게’ 상기되는 ‘통증’과 같은 기억으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서성거릴 때’가 자주 있었다. 바로 어린 시절의 그 ‘해 질 녘’ ‘마을 어귀’의 피곤하고 초라한 ‘그림자 둘’, 여전히 입술을 찌르고 베는 ‘짐승의 ‘송곳니 같은 그 기억’.
‘그림자 둘’은 그의 ‘늙은’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처럼 낡아서 끌어주기도 해야 하는 낡은 ‘자전거’였지만, 이 둘 중 어느 하나는 어느새 이제 자신으로 대체가 가능하거나 자신이 복합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여전히 ‘상처 입은 짐승’이었다. 그래서 그는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가을의 문틈에서’라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입지를 시간과 아울러 포괄 진술한다. 고국의 그 가을과 캐나다 위니펙 현재의 가을, 떠나온 자신과 현재 자신의 처지를 도저히 되돌릴 수 없다는 막막한 심경의 토로이다.
그런데 바로 그의 이 심경에서 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그의 견인과 묵종의 의지도 느낀다. 또 우선 보기에 체념 같지만 그 경계에 제한되지 않고, 이어지는 자기치유의 진실한 자양이 되고 있다. 우리는 ‘순한 짐승의 눈빛이 되어/삐거덕 삐거덕/문을 고치고 있는 그’(11연)를 보게 된다. 우리는 왠지 그보다 더 아프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다가 곧 무슨 각성을 하듯 안도하게 되고, 경의가 깃든 마음으로 그 정경을 바라보게 되고, 우리 시선에도 카타르시스가 일어난다. 앞 ‘해 질 녘’ ‘마을 어귀’ ‘그림자 둘’에서 이미 희미하게나마 느꼈던 아버지와 고향과 그리고 자신의 문호와 그는 드디어 화해하고 있는 중이다. ‘순한 짐승의 눈빛’에서 맑게 정화된 그 진정과 아울러 옛 패기도 느끼며 그러다가 우리는 우리도 결국 출분자가 아니냐며 자신에게 묻고, 또 그러다가 자신의 어떤 잊었던 상처를 위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폭한 발길로 ‘박차’서 부서져 있는 ‘문을 고치고 있는’ 그, 아니, 문호와 아버지를 바라보던 옛 미숙하고 무례하기도 했던 자신을 ‘고치고 있는’ ‘강원도 홍천 은행나무 숲’ 마을 ‘늙은 집배원의 아들’에게 그대는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탄식하면서.
떠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던 모든 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모든 아들에게, 시인과 함께 이 시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