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과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문득 자신의 과도하고 분별없는 욕망이나 저열하고 무상한 상황을 분식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용케 정시할 때에도. 이런 일탈의 시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좌선 명상에서 도래할 수 있고, 읽기나 걷기 같은 평범한 순간에서도 문득 촉발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탄식하듯, 그런 영감 비슷한 혼신의 긴장도 밀물 썰물 같은 생활의 관성에 곧 무뎌지고 잊혀 지기 쉽다. 흐지부지. 이것이 인생인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상과 다른 시공에 자신을 투신하여 자신의 각성을 다져보려고도 하는데, 우리의 이웃인 다음 시의 화자는 고봉(高峯) 등반을 선택하였다. 그가 짊어진 화두 또한 우리 모두에게 이미 낯익다. ‘더 이상 서로의 창끝을 겨눈 깃발이/펄럭이지 않는 무한천공’이란 서두에서부터.
더 이상 서로의 창끝을 겨눈 깃발이
펄럭이지 않는 무한천공
밀주창을 한잔하며 결기를 다져본다
고도 4,000m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박동하는 심장
암능지대를 지나고
한 평의 고단한 짐을 지고
강가푸르나를 지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앞날의 좁은 길
협곡을 가로지르는 흔들다리
흰색 룽다가 거센 바람에 파열음을 내며 나부낀다
웅장한 산일수록 먼 곳이 가깝게 보이는 법
내 안의 신이 당신의 신께
두 손 모아 인사드리며
한 그루의 나무도 살기 힘든 척박한 땅,
룽다의 깃발 소리를 듣는다
산장을 이어주는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나무다리를 건너
이제 고도를 올려야 한다
노새가 먼저 떠나고
나는 그 뒤를 걷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보라는 거세다
만년설을 스치는 고요
어둠이 내려온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함께 오르는
달빛조차 시린 저 설산
- 「안나푸르나 가는 길」 / 김정식
화자는 히말라야 산맥의 안나푸르나 고도 4,000m 지점에서 ‘가깝게 보이는’ ‘먼 곳’ 8,091m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밀주창을 한잔하며 결기를 다’진다. 우리 생각에 정상으로 가려면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고, 화자도 구도 비슷한 행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아마 화자가 파악한 우리의 그리고 세계의 ‘서로’ ‘겨눈’ ‘창끝’과 선동하는 ‘펄럭’이는 ‘깃발’이 우리의 생각보다 그 기세가 훨씬 날카롭고 위험한 듯하다. 심각성 인식이 우리보다 화자가 더 정확할 수 있다. 나아가 화합과 통합이 그만큼 지난하다 그 극복도 그러하다는 심정에서 ‘한잔’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래서 화자는 히말라야 14좌에서 하필이면 등정이 가장 위험하다는 안나푸르나를 정면에서 각오하고 오르려고 하는 것인가.
그런데 화자의 등정 길을 따라 가는 우리는 곧 화자가 자신의 고민을 작게 여기는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 ‘한 평의 고단한 짐을 지고/강가푸르나를 지난다’라고, 7455m 강가푸르나와 그 호수에 대비하여 문제의식의 크기를 ‘고단’하기는 하지만 ‘한 평’에 지나지 않는다고 각성한다. 화자가 왜 이곳에 왔는지 우리는 다시 알 수 있다. 등정 길은 여전히 ‘암릉(巖陵)’ 능선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앞날[전인(前刃)]의 좁은 길’이지만, ‘거센 바람에 파열음을 내며 나부’끼는 ‘룽다’, 그 경전(經典) ‘깃발’의 ‘소리’를 들으며, ‘웅장한 산일수록 먼 곳이 가깝게 보이는 법’이라고 자신을 경책(警責)하고 결행 의지를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화자의 심정 토로, ‘내 안의 신이 당신의 신께/두 손 모아 인사드리며’를 읽고 갑자기 화자보다 숙연해진다. ‘당신(안나푸르나)의 신’이야 우리의 산신(山神)으로 유추할 수 있지만, ‘내 안’에 ‘신’이 있다 하다니, 게다가 그 ‘신’이 ‘두 손 모아 인사드’린다고 하다니... 화자의 정성과 경의도 포함하여 이 비상한 정경에 우리도 저절로 합장하며 두루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그루의 나무도 살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시연된 이 통교에서 진지하고 고매한 격조를 헤아리기 어렵고, 숭고미마저 없지 않다. 드디어 화자는 ‘산장을 이어주는 길을 버리고/위태로운 나무다리를 건너/이제 고도를 올’린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보라는 거세다’고 하였다. 이전 시행들처럼 행로의 사정 묘사이지만, 오를수록 내습하는 역경과 고난을 환기하는 환유로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 와중에 그곳 ‘만년설’에 ‘스치는 고요’처럼 ‘어둠이 내려’온다. 이 점증의 일대 장관을 배경으로 ‘달빛조차 시린 저 설산’의 정상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함께 오르’고 있다고 화자는 진술을 마친다.
의외의 말미에서 우리는 먼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내리꽂듯 가파른 최종 636m를 기어이 무릅쓰고 오르고 올라서 드디어 안나푸르나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드디어 그럴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시 서두의, ‘더 이상 서로의 창끝을 겨눈 깃발이/펄럭이지 않는 무한천공’, 즉, 증오와 선동을 종식하고 화합과 통합을 이룬 경지, 그 이상에 마침내 접맥될 수 있다는 긍정의 사람과, 마침내 그럴 수 없다는 부정의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달빛조차 시린 저 설산’의 정상으로 서로 동반 의지하여 ‘함께 오르는’ 모습에 마음 복잡해지고 말문도 시려진다.
서로 끝까지 동반할 것인지도 의문. 그러다가 우리는 희미하게 생각할 수 있다. 저 두 사람은 사실 한 사람이라고. 두 사람이란 바로 화자 내면의 서로 다른 두 생각일 수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에서도 아무도 그 종국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건 한 사람이건, 정상 등반에 성공한다면, 긍정은 긍정되고 부정은 부정되기에, 우리 모두 또 합장하고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