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02)] ‘죽다가도 포기한 것같이 말라붙어 있는 모양새가’
우리는 한번쯤 겨울 산을 등산한 적이 있고, 혹한(酷寒) 바람을 겨우 견디며 고개 숙이고 오른 정상에서 망연해졌었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장대한 정경. 만산홍엽(滿山紅葉) 가을 산과 판이하게 다른 여리고 마른 나목(裸木)들, 특히 능선에 무연히 도열한 그 모습이 거듭 생소하고, 게다가 바람소리 거세도 언제까지나 이어질 듯한, 고집처럼 고여 있던 침묵. 우리는 그 정경에서 의연한 의지를 느끼고 인동(忍冬)의 미덕을 새겼다. 흰 뼈와 같은 ‘개골(皆骨)’의 연속에 우리 조상들은 경탄하며 겨울 금강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하였는데, 모든 겨울 산을 그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겨울 산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음 시를 읽는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겠다. 하지만 화자가 본 정경과 소회는 이상과 다르다.
바람이 불고 나무가 생기다가 말았다.
생기다가 만 나무들이 자라면서 웃자라지 못하고
그 자리 그대로 틀어박혀서 생기다가 만 모양 그대로
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심하다. 바람이 세고 바람이 거칠어서
더 자라지는 못하고 웃자라는 것도 잊고
능선을 장식하는데, 장식이랄 것도 없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데
붙어 있는 모양새가 하도 나무 같지 않아서
생기다가 만 것 같고 자라다가 포기한 것 같고
죽다가도 포기한 것같이 말라붙어 있는 모양새가
자꾸 눈길을 끄는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능선을 따라서 눈길을 떼고 싶어도 자꾸자꾸 나타나는데
그 모양새가 하도 기가 막혀서 나무라고 부르려다가 말았다.
질려버려서 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
- 「이유가 있을까?」/김언
이 시는 11행 ‘능선을 따라서 눈길을 떼고 싶어도 자꾸자꾸 나타나는데’까지는 우리의 감상을 잘 촉진하며 공감도 잘 확대한다. 나무들이 ‘바람이 세고 바람이 거칠어서/더 자라지는 못하고 웃자라는 것도 잊고’ 있다고 한다. ‘그 자리 그대로 틀어박혀서 생기다가 만 모양 그대로’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나무들의 이 상태는 작중 겨울이 시작되면서 그런 모습인 것이 아니라, 이전 어느 시기부터 이미 그런 상태였다고 하겠다. 세찬 바람이 불 뿐만 아니라 높은 고도에 토질도 좋지 않은 조건에서.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중 이 정경 역시 겨울 산 능선의 황폐하고 수척한 모습이며, 그 일반 정경이 아니더라도, 봄, 여름, 가을과는 아주 다른 풍경이다.
정상의 땅에서 겨우 발아하여 뿌리를 내리고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었으나, 성장이 중지되고 성장을 망각하기도 한 나무들.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나무들은 다시 겨울을 맞았고, 그래도 ‘능선을 장식하는데, 장식이랄 것도 없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화자가 묘사한 이 정경을 그대로 따라 추인할 수 있으며, 이어지는 7, 8행, ‘붙어 있는 모양새가 하도 나무 같지 않아서/생기다가 만 것 같고 자라다가 포기한 것 같고’를 읽고는, 화자가 나무들의 상태와 조건을 동정하면서도, 나무들이 ‘자라’기를 ‘포기한 것 같’다며 힐책은 아니지만 그 기운을 섞어서 유감스러워하는, 모순된다고 할 이율의 심경을 지니고 있다는 정황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붙어 있는 모양새가 하도 나무 같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라다가 포기한 것 같’아서 ‘나무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화자의 의사를 고려해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의 감상은 곧 확장된다. 9, 10행 ‘죽다가도 포기한 것같이 말라붙어 있는 모양새가/자꾸 눈길을 끄는데’에서, 화자의 그 주목과 비례하여 우리의 인지 상태도 쇄신되고 고양된다. ‘죽다가도 포기한 것’은, 나무들의 형편없이 ‘말라붙어 있는 모양새’를 직유하는 매체이면서 단순한 수사로 그치지 않고 그 자체에 역설성 효과가 함축되어 있다. 매체가 본체를 압도하는 듯. 나무들은 ‘바람이 세고 바람이 거칠어서/더 자라지는 못하고 웃자라는 것도 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론 죽기를 포기한 상태, 즉 죽고자 하여도 죽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유추의 대상이 된 ‘모양새’가 사실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화자의 주관과 해석에 가까울 것이다. 이를 포함, 어쩌면 우리가 본 정경과 화자가 보는 정경이 같은 정경이지만 화자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화자는 그 긴 대열에 ‘하도 기가 막혀서’ ‘나무라고 부르려다가 말았다’고도 한다. 즉 모습이 처연하고 기이하여 나무이기는 하지만 나무라고하기 어렵다... 이 시행에는 앞에서 살펴본 화자의 유감이 반복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마지막 13행, ‘질려버려서 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를 읽고, 우리는 좀 당황하며 숙고해야 할 것이다. 누가 ‘질려버’렸나. ‘나무’인가, 화자 자신인가부터. 하여간 이 시는 이 끝 행의 느닷없는 의외의 진동으로 전체 메시지의 질량과 구조가 그 이전과 달라진다. ‘나무’라면, ‘바람이 세고 바람이 거칠어서’ ‘나무’가 ‘질려버’렸다는 것일 것이고, 이전의 문맥과 부합된다. ‘심하’고 ‘세고’ ‘거칠’은 ‘바람’과 그 막심한 기세가 부각된다. 하지만 13행의 이 ‘나무’는 직전 12행의 인정이 거부된 ‘나무’와 그 뜻이 맞서면서도 다르기도 하다. 이 모순어법으로 부각되는 13행의 ‘나무’는 어떤 뜻의 나무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극한 인고의 화신이란 것인가. 그렇다면 이 시는 우리가 겨울 산에 올라 새겼던 ‘인동의 미덕’을 결국 이야기하는 듯한데, 의지의 지속에서가 아니라 피동의 운명으로 형상화한 이색(異色)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질려버’린 주체가 12행에서 생략되었고 13행에 연속되는 주어인 화자의 자칭 ‘나는’이라면, ‘생기다가 만 것 같고 자라다가 포기한 것 같고/죽다가도 포기한 것같이 말라붙어 있는 모양새’에 화자가 질려, 화자 자신도 그런 ‘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취지의 토로로 13행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무들의 그 ‘모양새’, 그 강도를 점증 심화하면서 자신조차 압도하고 있다는 공감과 그 심정의 고백일 것이다. 그렇다면 13행의 ‘나무’는 상기 문맥과 연관이 있겠지만 상징으로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두 음미가 가능하고 다른 음미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인지 시인에게 물을 수는 없다. 시인은 그저 암시하며 우리 독자에게 그렇게 질문한 것이다. 나아가 자신에게도 그렇게 묻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시인의 관련 의도는 이 시 제목에 이미 대변되어 있다. 그리하여 해 저무는 세말(歲末) 개골(皆骨) 겨울 산, 사정없이 몰아치는 혹한 바람을 무릅쓰고 거칠고 메마른 그곳에 올라 나무들의 모습을 한번 보고, 어떤 형이상 성찰을 해보자고 시인은 권유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