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마셔도 맛이 없고
죽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
꽃을 보아도 고운 줄을 모르고
세상에 반가운 것이 없다
- 「맛이 없다」 / 임보
범박하면서도 간략한 직설의 이 시를 읽고 독자들이 시행들의 의미를 아무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평탄해서 오히려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우리도 어떤 상황이나 신변의 어떤 일로 해서, 화자와 같은 상태에 빠졌던 적이 있고, 아니 정도가 더 했을 수 있으며, 현재 그런 상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읽고 그 이유일 배경이 궁금해진다. 나와 비슷하기보다는 아마 다른 무엇을 기대하면서. 감상의 이런 진행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과 관점으로 시를 읽으면서도 자주 떠올리는 질문이기도 하며, 우리가 기대하는 인간 이해로서의 타인 이해의 확장에 바람직하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살아도 우리는 나와 여러 다른 입장에 서 있는 타자들과 연결되어 있고, 대충 살아갈 수 있지만 서로 제대로 영위하려면 차분한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작은 조직도 물론이고 사회의 문제 해결이나 구조 조정도 일단 개인과 개인의 타자들이 서로 이해하는 휴머니티가 기초로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화자는 혀의 미각에도 눈의 시각에서도 아무 감각이 없다고 하고, ‘세상에 반가운 것이 없다’고 한다. 몸의 어떤 질환에서 그 까닭이 기인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기본인 후자에서 화자가 마음의 하강, 즉 어떤 낙담의 심정을 겪고 있어 그렇다고 추정하기 쉽다. 아니라고 하더라도 화자도 그 까닭을 밝히지 않는 이상, 그런 추정을 부인하기 어렵다. 언젠가도 언급했지만 시 읽기에서 왜곡이 아니면서 일리 있는 추정이라면 어떤 추정도 시와 시인은 사양할 수 없다.
오늘(2024년 12월 18일) 위 시를 읽거나 나중에 게재 날짜를 참조하며 읽을 우리는 시에서 생략되어 있는 배경을, 우리의 다수가 지난 12월 3일 비상계엄 발동과 해제, 그리고 그 이후 관련 상황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생략은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 시의 전경(前景)으로 부각하려는 취지에서가 아닐까 여길 수도 있겠다. 필자도 그중 하나. 그렇게 우리가 이 시 이해를 마친다면 마치고 나서 우리는 그 후속인 공감을 달리할 것이다. 그 여부와 정도를, 우리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이유가 다르지만 화자의 토로에 공명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고, 이유가 같으면서 화자의 토로에 실망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역대의 모든 정치 현안을 주제로 다룬 시는 양비 양시도 포함하여 이런 상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고, 시인들도 자신과 해당 시의 그런 운명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좀 늦어 죄송하지만 이 시의 배경을 그렇게 파악한다면, 물론 고의가 아니지만 화자 의 의도를 부당하게 왜곡한 처지가 된다. 시인은 같은 호 시지(詩誌)에서 「근황」이란 시에 「맛이 없다」를 동반시켜 발표하였다.
저 유럽의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의 군병들이 쳐들어와/전란을 일으켜 세상을 혼란케 하고//
저 중동의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아랍국가들이/포탄을 쏟아 대며 세상을 긴장케 하던//2024년 9월 어느 날//시인 임보의 성위국(聖胃國)에서도/반란군을 토벌하는 일대 작전이 감행되다//보이지도 않은 침략 균병(菌兵)들에게/나는 소중한 내 위의 영토를 절반쯤 잃고//와신상담(臥薪嘗膽) - 고전(苦戰)의 전화(戰禍)를 맛보다/세상이 참 허하고 아득하다
「근황」은 나름대로 독자성이 있으면서도, 「맛이 없다」에는 없는 그 배경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화자이기도 한 시인은 위장에 암이 발생하여 지난 ‘9월’에 위 수술을 하였고, ‘전화(戰禍)’와 같은 후유증을 현재 겪고 있는 중이다.[‘세상이 참 허하고 아득하다’] 그 상태의 구체 심정을 「맛이 없다」에서 피력한 것이다. 참고로 두 시가 실린 시지는 지난 12월 1일에 발간되었다.
이 사례에서도 시 감상에서 우리의 선입견과 입장이 새삼 문제로 대두된다. 우리는 시 언어의 실체 모색에 의거하면서도 모종 선입견과 자신의 관점을 완전 배제하고 시를 읽을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의 감상을 촉진하며 시의 자질이자 매력인 각종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는 자원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시를 오독하게 하는 동인(動因)도 된다. 일리 있다면 어떤 추정도 가능하다고 하였지만, 「맛이 없다」와 같이 참조할 근거가 있어 그 근거에 따라야 한다면, 다른 추정의 해석과 판단은 결국 오류에 해당하며, 현실을 혼란케 하고 의사 결정을 왜곡하는 사실 차원의 오인과 오해의 폐단과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역시 경계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시를 포함해 타자의 텍스트에서 우리가 의미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관점에 관련된 외부 상황 파악을 자신도 모르게 유일한 근거로 삼고, 또 그 의의를 판정하기 쉽고, 나아가 자신의 견해를 부가하여 신념의 형태로 적극 주장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검증하지 않았지만 단서가 있으면 이를 근거로 모종 조작까지 감행한 해석이나 정보를 유포하며 이 엄중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오판과 낭비를 야기하고 있다.
만약 「근황」이 없거나 우리가 읽지 않았다면 「맛이 없다」는 앞에서 살핀 대로 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렇게 감상되고 말았을 수 있다. 제재의 원천인 현실 세태와 무관할 수 없고, 미적 허구이면서도 사실이 기록되거나 섞이기도 한 시. 그 감상에도 역시 독자의 공정하고 진솔한 양식이, 그리고 객관을 우선하는 접근과 때로는 일시 유보의 태도가 요청된다.
우리는 다행히 「맛이 없다」의 생략된 배경을 쉽게 알 수 있고, 여전히 범박하면서도 간략한 직설의 시로 여길 수 있겠는데, 문득 한 무상(無相)의 취지가 내포되어 있지 않은지 그 기미를 감지할 수도 있다. 병변의 질고에 이어진 세정(世情)과의 거리 발생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서도, 모든 집착을 떠나 초연한 지경의 상태를 말하고 있지 않은지. 의지로 추구하는 초탈이나 그 기원(祈願)은 우리에게 낯익은데, 이 시의 허탈 기운이 스며있는 피동 초탈은 우리에게 친근하면서도 낯설다고 하겠다. 이 시는 다음 노래와 대조되면 그 감상이 더 진전될 것 같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밀양아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