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37)] 박경원 '지워진 사랑8'
지워진 사랑 8
박 경 원
누군가의 버린 바퀴에 기댄다
사랑의 예감은 늘 오릿길 너머에 있었다
꽃들, 제 힘으로는 더 붉어질 수 없는
그 계절이 아직도 빛나고
모든 사랑은 비를 맞거나 초겨울의 번들거리는
추위 속에서 마굿간처럼 달콤했다
저녁의 성서와 늙은 농부가 떼꾼하게 읽어주던
위로의 귀절들
그날밤에도 나는 한낮의 햇살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바퀴에 기대어 세상의 길들이 되었다가
다시 또 전쟁으로 돌아가는 바퀴의 운명을
떠올렸고
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위의 시는 박경원 시인이 2010년에 펴낸 연작시집 『지워진 사랑』속에 든 여덟 번째 시이다. 시집에는 같은 제목으로 67편의 시가 담겨 있다.
지워진 사랑이다. 추억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랑이다. 그러나 역설이다. 그 사랑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은 지워지지 않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사랑을 지우려 밤을 새운다.
‘누군가의 버린 바퀴에 기댄다’라고 했다. 기댈 수 있는 바퀴는 구르지 않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바퀴이다. 그렇기에 그 사랑은 어쩌면 현재진행형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의 예감은 늘 오릿길 너머에 있었다’라고 했듯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이다. 그 ‘오릿길 너머’라는 거리감이 미묘하다. 분명히 그 자리에 있음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뚜렷이 보이지도 않는 그 거리에 사랑이 있다. 따라서 또 완전히 현재진행형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랑은 꽃들이 제힘으로는 더 붉어질 수 없는 계절의 절정에도 빛나고 ‘모든 사랑은 비를 맞거나 초겨울의 번들거리는/추위 속에서 마굿간처럼 달콤’하다. ‘저녁의 성서와 늙은 농부가 떼꾼하게 읽어주던/위로의 귀절들’처럼 스며들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 사랑이 지워진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외로운 일상과 무관치 않다.
박경원 시인을 만날 때마다 느껴야만 했던 불안함을 생각해 본다. 시인은 몸집도 키도 컸다. 그런데 안경 너머의 그 눈빛이 한없이 맑고 순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는 견디기 힘든 여린 눈빛이었다. 자연스레 삶은 퍽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마저 그런 그림자를 묻혀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하여 ‘그날 밤에도 나는 한낮의 햇살이 희미하게/남아있는/바퀴에 기대어 세상의 길들이 되었다가/다시 또 전쟁으로 돌아가는 바퀴의 운명을/떠올렸고/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불면의 밤을 이룬 것이었으리라.
내가 박경원 시인을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1980년 대가 거의 다 끝나 갈 무렵이었다.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의 정처 없는 방황을 끝내고 막 일상의 뿌리를 내릴 거처를 마련할 때였다. 지금은 행궁동 공방길로 불리는 그 길에서 박경원 시인이 ‘이층에서 내려다본 거리’라는 커피숍을 운영했다. 그곳에 ‘시발(詩發)’이라는 다소 앙큼하기도 한 이름을 한 시동인들이 모였다. 내가 30대 초반이었고 박 시인은 20대 후반이었다. 본래는 소설을 쓰겠노라고 하였는데 그의 글을 볼 때마다 느낀 게 소설보다는 천생 시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시의 길을 권한 게 나였다. 왠지 마음이 아리다. 그가 일찍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이라는
67편으로 된 그의 시집 『지워진 사랑』의 예순일곱 번째 시는 단 한 행으로 쓰여 있다.
지워진 사랑 67
그리고 아무 사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경원 시인을 향한 많은 독자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삶이 어떠했나를 어렴풋이나마 알기에 그 어떤 시적 수사도 없는 한 줄에 더욱 가슴이 아린 밤이다.
박경원 시인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1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
계간문예지 『차령문학』 발행인
시집 『시멘트 정원』외 다수
2023년 2월 9일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