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05)]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엄동설한,

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

극지를 항해하는

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

연료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

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

낡은 증기선을 한 척 끌고

막막한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

예까지 왔다.

밖은 눈보라 

아직 실내는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출항의 설렘은 이미 가신 지 오래,

목적지 미상,

항로는 이탈,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

벽에 매달린 십자가 아래서

어긋난 해도(海圖) 한 장을 손에 들고

난로의 불빛에 비춰보는 두 눈은 어두운데

가느다란 흰 연기를 화통(火筒)으로 내어 뿜으며

북양항로(北洋航路),

얼어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삶은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다.

   - 「북양항로」/오세영 

 

 화자는 ‘엄동설한,/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극지를 항해하는/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고 시작한다. 이 시 이야기의 단초이자 화자의 화두이기도 한 이 단락, 우리는 먼저 모두의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주목하고 음미해야 할 것이다. 겨울에서도 겨울, 숨 막히도록 시야를 가리도록 세찬 바람에 휘날리는 엄혹한 눈발의 추위. 겨울의 한 절정에 해당할 이 기상(氣象)은 단순한 날씨뿐만 아니라 이 시의 메시지에 간여하며 향방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여겨진다. 

 5행부터 22행까지는 상상 형식으로 전개되는 그 추이이며, 우리가 잘 인지한 대로 화자가 우리 독자를 의식하고 토로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어울리는 독백이다. 통찰의 관점은, ‘나는/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 ‘연료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막막한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예까지 왔다’에서 알 수 있듯, 갖은 파란(波瀾)을 겪은 노년의 시선이다. 그 대상이 되는 인생의 시기는 ‘출항의 설렘은 이미 가신 지 오래’에서 알 수 있듯, 본격 삶으로 간주되는 마흔 살 안팎 중년 이후의 이력을 망라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의 끝 두 행, ‘삶은/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다’란 결구에 예상하기는 했지만 실망스럽고 당황스럽다. 그 엄동설한의 밤바다에서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와 같은 ‘낡은 증기선 한 척’이 인생이라니. 더구나 이 은유들에 고착되어 있는 수식도 과도하다. 중년 이후뿐만 아니라 노년에서도 여전히 ‘목적지 미상’에 ‘항로’ ‘이탈’에다, 이미 실제에 ‘어긋난 해도(海圖)’인 줄 알면서 그래도 그것이라도 없어서는 한 치 앞도 막막해선지 ‘난로의 불빛에 비춰’ ‘어두운’ ‘두 눈’으로 참고하여야 하는 곤궁한 아이러니에 직면하고 있다니. 

 반성이나 승화, 절제나 초탈의 메시지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 방황은 아무래도 미숙하고 부당한 감상(感傷)의 유로(流露) 같아서 거듭 우리를 심란하게 한다. 화자 개인의 인생론을 표방하고 있지만 일반론으로도 확산될 이 귀결이 우리의 개연성 있는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우리가 오늘 목전의 이해에 골몰해 내일의 사정을 기피하고, 좌우상하의 시야를 가리고 그저 달려가는 노둔한 준족(駿足)의 경주마라고 자조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비전은 과장이 아니냐며 반발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 심사, 오늘 우리의 현실로 시선을 돌리면 무력해지고 만다. 예상하지 못했던 계엄 선포, 그 전후의 탄핵들, 그 사유의 헌법과 법률 위반 여부 갈등, 이 극심한 와중에다 인정하기 너무 아프고 힘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우리 모두를 갈등과 비애로 못내 구속하는 이 비상한 철쇄(鐵鎖)의 점철은, ‘얼어붙은 밤바다’의 ‘북양항로(北洋航路)’에서 ‘목적지 미상’에 ‘항로’ ‘이탈’에다 ‘어긋난 해도’로 ‘표류’하고 있는 ‘낡은 증기선’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  우리는 이 시를 한 인생론으로 국한할 수도 있지만 오늘 우리의 국난과 병렬하여 읽을 수 있고, 그런다면 이 시의 정조는 현실과 조응하며 화자는 한 유별난 노년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일반 자아를 대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를 다시 살피면 의외에도 그 기저에 함축되어 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혹독한 미로의 그 상황이 차라리 화자에게 위로가 된다고. 위로가 되고 있다고. 오류와 비관이 착종되어 있지만 화자의 그 심중 저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맞서며 침묵의 역설(逆說)을 이루는 견인의 운항 의지가 있다고. 그 ‘배’의 일탈 맥락에 압도되어 우리가 제대로 주목하기가 쉽지 않았을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이란 화자의 진술이 그 원천이리. ‘엄동설한’ ‘밤바다’의 검은 하늘에서 빛나는 그 별들. 막심한 일탈들을 야기한 그 인위의 표상이기도 한 ‘어긋난 해도(海圖)’와 대비되는 그 별들이 어떤 의미로 빛나는지, 화자의 한계도 비추는 그 별빛이 현시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추정은 결국 우리 독자들의 몫이다. 

 그리하여 ‘엄동설한,/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극지를 항해하는/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고 한 화자의 애초 면모를 떠올리고, 같은 이 ‘엄동설한’에서 다같이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우리를, 우리도 마땅히 형상화해야 할 것이다.   

 구체 사실을 제시하면서 추상 유추를 권유하고 있는 이 시는 쉽게만 읽을 알레고리가 아닐 것이다. 다시 읽으면서 1-4행을 애초대로 화자가 사실을 직설하는 진술로 읽어도 좋지만 이도 시인이 우리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배려한 일상 국면의, 또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시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얼마든지 역설(逆說)이 더욱 성립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 시의 한 여운으로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1916)에서 피력한 유명한 언급을 연상할 수 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북양항로」의 ‘북극성’과 ‘십자성’은 일견 루카치의 별의 인유(引喩)인 것 같지만, 그 시공이 다르고 따라서 그 지향도 다르며, 현재 별빛이 항로를 인도하고 있는지 그 신념의 여부가 또한 다르다. 나아가 ‘극지를 항해하는/밤바다의 선박’에는 ‘석탄을 태우’는 ‘늙은 화부’가 있고, ‘아직 실내는 온기를 잃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 위 밤하늘에서 다시 말해, 창공에서 빛나는 별보다 훨씬 밝은 두 별이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