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길
채 성 병
순도 높은 보드카는 자작나무 숯으로 걸러야
제 맛이 난다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을
구천동 지나 남원 가는 길에 문득 떠올리는 찰나
자작나무들 일으킨 구절양장 꼬불꼬불한 길들이
나를 걸러내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마전재 안성재 솔고개 집재 싸리재 수분재……
목구멍 타들어 가는 순도 높은 보드카처럼
많고 많은 고개들이 좀 더 확실하게 날
걸러내기 위해 요동친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자작나무들 모여 이룬 숲에 가면
자작나무 타고 남은 한 덩이 숯이 되겠네
자작나무들 모여 이룬 숲에 가면
거르고 거른 한 방울 독한 술이 되겠네
구천동 지나 남원 가는 길
저녁 어스름에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들
조심히 아주 조심히 비껴서 있다
춥다. 겨울바람이 모진 거야 당연지사 자연의 섭리이다. 웅숭그리고 궁상을 떨다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내려서 창가로 간다. 영화 ‘닥터 지바고’를 적시던 ‘라라를 위한 테마’가 듣고 싶어지는 저녁이다. 통나무집 책상에는 흐린 남폿불이 흔들리고 이 세상이 시작되면서 본래 눈 내리는 밤밖에는 없었던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덮어버리는, 함박눈 내리는 자작나무 숲을 생각한다.
위의 시는 도서 출판 ‘문학과 사람’이 2020년에 펴낸 채성병 시인의 시집 『아직도 아름다운 세상은 있다』 속에서 발췌한 「자작나무길」의 전문이다.
시인이 모처럼 길을 떠났나 보다. 남도 쪽이다. 무주 ‘구천동 지나 남원 가는 길’이다. 덕유산 아니면 지리산의 어느 산자락 길이었을 게다. 자작나무 숲을 보았다. 그 찰나에 이는 생각이 ‘순도 높은 보드카는 자작나무 숯으로 걸러야/제 맛이 난다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다.
걸러야 하는 것이 어찌 맑은 술뿐이랴. ‘자작나무들 일으킨 구절양장 꼬불꼬불한 길들이/나를 걸러내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라며 우리네 삶에서 자신을 걸러내야 하는, 그리고 그 길은 탄탄대로가 아닌 구절양장 ‘마전재 안성재 솔고개 집재 싸리재 수분재……’ 수많은 재를 넘으며 눈물겨운 사연으로 젖은 길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목구멍 타들어 가는 순도 높은 보드카처럼/많고 많은 고개들이 좀 더 확실하게 날/걸러내기 위해 요동친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라며 성찰의 깊이를 더한다.
이어서 시인은 ‘자작나무들 모여 이룬 숲에 가면/자작나무 타고 남은 한 덩이 숯이 되겠네/자작나무들 모여 이룬 숲에 가면/거르고 거른 한 방울 독한 술이 되겠네’라며 자신을 걸러낼 숯은 스스로를 태운 것이어야 하며 비로소 한 방울 순도 높은 삶을 걸러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독자에게 준다.
채성병 시인이 귀애(貴愛)하던 것들을 이승에 고스란히 두고 떠난 지도 벌써 5년이 넘게 지났다.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30여 년이 넘게 광교산 자락을 소요하였고 버드나무 휘늘어진 수원천을 따라 흐르기도 하다가 남문 뒷골목에 닻을 내려 선술집을 찾아들곤 하다가 수원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수원의 시인이다.
필자가 시인을 처음 만난 곳도 남문 뒷골목의 어둑한 술집에서였다. 도수 높은 안경 너머 두 눈이 젖어 있었다. 젖은 만큼 깊고 또 참으로 애잔하면서도 선하디선한 눈빛이었다. 마땅한 호칭이 없어 ‘선배님’이라 불렀더니 ‘야 선배는 무슨, 거북하다. 그냥 형이라고 해라.’하여 술 몇 잔에 오래 마음을 튼 형과 아우처럼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보고 싶다.
나는 어느 자작나무 숲을 찾아 ‘저녁 어스름에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들’ 사이에서 자신을 태운 숯으로 순도 높은 술 한 방울이 될까.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무주 지나 남원 가는 여정이라도 한 번 잡아야 하나. 어쩌면 긴 방황의 끝에 덕유산 용추로 자취를 감춘 사내의 먹옷 자락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채성병(蔡成秉, 1950.12.16.∼2019.10.3) 시인
1978년 계간지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세가지 架空의 우울'(1972, 현대시학사)
'녹슨 단추가 달린 주머니 속의 시'(1989, 나남)
'별을 찾아서'(1989, 해냄)
'검은 소에 관한 기억'(1990, 민음사)
'연안부두 가는 길'(1994, 책나무)
'중독된 땅에서'(2001, 다층)
'큰 새를 꿈꾸다'(2006, 다인아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