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10)] ‘오그라지는 백일몽처럼/작고 하얀 얼굴 하나가 또렷이’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옮기지 말걸 그랬습니다

 

두 번의 이별을 지날 동안 두 번 꽃을 피운

해국 한 삽을 떠서 바람이 다 지나갈 수 없어 돌아나오는

복도 끝방으로 옮겼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피던 꽃이 바람 없이 필 때는

흰빛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연약해졌습니다

 

한번 넘어지는 힘으로

평생 눕게 하던 바람이 크게 울다 접혀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녹기 좋은 몸으로 허물어졌습니다

 

아주 설 수 있는 건

실핏줄 터지는 목소리뿐이어서 꿈결에도

복도 끝까지 다녀오는 비명이 있었습니다

 

한겨울에도 반상록이던 해국이

가지 끝에 하나씩 꽃을 다는 것도 잊고

 

꽃잎 헤어보던 사랑의 궁금증도 희미해져서

 

셀 수 있는 이름들이 소금 바람을 따라

절벽 아래 바다로 녹아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날을

간신히 기억해내고는

 

방을 조금씩 비우고 있었습니다

 

한 삽 한 삽 흙의 무게도 덜어주려고 이파리도 얇아졌습니다

누렇게 떡잎도 지는 사이

 

겨우 목을 가누는 3개월 된 신생아의 꿈처럼

혼자 깊이 들여다보다 오그라지는 백일몽처럼

 

작고 하얀 얼굴 하나가 또렷이 피고 있었습니다

   - 「해국(海菊)」/천수호

 

망망(茫茫) 바다에 무릎 꿇듯 직면한 절벽, 거친 바람과 거센 물결이 끝없이 부딪히고 부딪히는 그곳에서 서식하는 해국은 바다를 보는 우리가 보기 어렵고 바다의 눈에는 잘 띄기기도 한다. 그런 해국을 그 해벽의 경사에서 ‘바람이 다 지나갈 수 없어 돌아나오는/복도 끝방’으로 옮기고 그 경과를 노래한 이 시를 다 읽고, 우리는 이 시의 정조가 뜻밖에도 ‘희망’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 시의 첫 연이자 첫 행인 ‘옮기지 말걸 그랬습니다’에 어린 후회의 유감을 이후 시행들의 기저 저류로 영향 받았으나 끝 두 연, ‘겨우 목을 가누는 3개월 된 신생아의 꿈처럼/혼자 깊이 들여다보다 오그라지는 백일몽처럼//작고 하얀 얼굴 하나가 또렷이 피고 있었습니다’를 읽자, 우리의 가슴에도 ‘희망’이 바로 그렇게 피어났다.  

 그 ‘희망’은 기사회생의 기적 같지만 여전한 고통에 지난한 처절을 동반한 낯선 정경이다. 해국은 ‘흰빛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연약’해졌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녹기 좋은 몸으로 허물어졌’으며 ‘이파리도 얇아졌’고, ‘누렇게 떡잎도’ 시들었으며, 무엇보다도 풍랑 몰아치는 절벽에서도 ‘가지 끝에 하나씩 꽃을 다는’ 기억도 ‘잊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인가. 그 끝 두 행을 읽었어도 그 뒤에 ‘옮기지 말걸 그랬습니다’가 반복 강조되었으나 다만 생략되어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사실 화자에게 그 ‘작고 하얀 얼굴’은 한편 후회할 정도로 애처로워 잔인하다고 할 것이다. 화자는 그것이 ‘오그라지는 백일몽’, 즉 ‘실현할 수 없는 공상’ 같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화자는 정녕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 알지만. 

 이제 우리는 이 시의 화자가 해국을 살폈듯이 화자를 살펴볼 차례이다. 1, 2연만으로도 우리는 화자가 어떤 ‘두 번의 이별’을 하였고, 그동안 어느 바닷가 절벽에서 해국이 두 번 꽃 피우던 모습을 풍랑 몰아치는 바다의 심정으로 주목하였으며, 드디어 해국을 바람이 드나들지 못하는 ‘복도 끝방’으로 옮겼다. 옮긴 이유가 그런 조건에서 꽃 피듯 이별 회복을 염원해서인지, 이별을 잘 견디자는 자기격려에선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는데, 아마 전자일 것 같다. 

 그러자 예상과 달리 해국은 거친 ‘바람’이 불어도 잘 피던 꽃이 바람이 불지 않자 ‘흰빛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연약해졌’다. ‘바람’이 오히려 해국의 개화를 강력 촉진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 마냥 연약해진 해국의 ‘실핏줄 터지는 목소리’의 ‘꿈결에도/복도 끝까지 다녀오는 비명’을 우리는 우선 화자와 함께 ‘복도 끝’이 아닌, 화자의 거처에서 듣는다. 단말마는 아닐지라도 이제 해국은 더 이상 ‘한겨울에도 반상록이던 해국’이 아니다. 

 그런데 한편 그 ‘비명’이 누구의 비명인지 갑자기 의아해진다. 해국의 비명이면서도 화자의 비명 같기도 하다. ‘꿈결에도’라고 했는데, 이 ‘꿈결’이 해국의 그것이라기보다 화자의 그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지는 ‘꽃잎 헤어보던 사랑의 궁금증도 희미해져서’를 읽으며 그 주체가 화자로 인식되면서 강화되고, ‘셀 수 있는 이름들이 소금 바람을 따라/절벽 아래 바다로 녹아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날을/간신히 기억해내고는//방을 조금씩 비우고 있었습니다’에서, 급기야 해국과 화자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리고 ‘방’, 즉 ‘바람이 다 지나갈 수 없어 돌아나오는/복도 끝방’은 물리 차원의 공간이면서도 ‘두 번의 이별’을 한 화자가 멀리 방치한, 의식 저 편 끝의 환유로 읽을 수 있다. 이제 보니 그 ‘방’에는 옮겨진 해국만이 있었지 않고 화자가 잊을 수 없는 ‘이름들’도 있었다. 

 드디어 화자는 그 ‘방을 조금씩 비우고 있었’는데, 또 뜻밖에도 ‘작고 하얀 얼굴 하나가 또렷이 피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서술 시제에서 알 수 있듯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 그렇다면 그 이후 현재는 어떤 상황일까. 을사년 설날의 서기가 여전히 감도는 이때에 우리는 다시 끝 두 연을 읽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