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도에 따르면 요양원에서 요양을 담당할 요양사가 전국에 걸쳐 4만여 명이나 부족하다고 한다. 요양원 설립과 운영 개시가 어제 같은데, 급격한 변화가 제기한 이런 현안에 직면하다니. 관련 당국보다도 우리 시민과 요양원에 입소한 분들과 입소해야 할 분들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요양원의 시설이 미흡하고 서비스 수준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세평이 있는데, 그 개선은커녕 더 심화될 우려를 불식하기 어렵게 됐다.
이가 없어 불편하다 얘야
들리지 않아 알 수 없다 얘야
앞이 흐릿하니 네가 누구냐
어린 시절 장딴지에 호된 매를 치던
기개는 어디 갔는지
옛 부모 얼굴이 아닌 두 늙은이가
내 미래의 모습으로 칭얼대신다
갓난쟁이 똥오줌을 받아주던
빚진 채무를 되갚음인가
짐승만도 못한 고생길이,
우리가 사람이어야 하기에
외면치 못할 막바지 사람 도리가
널려 펼쳤다
뺑덕어멈 같아 미웁기도 하고
심 봉사 같이 공양미 삼백 석을
되갚아야 할
인당수 깊은 선택이 눈앞에 있다
- 「봉양」/박금리
1, 2, 3행에서 우리는 화자의 부모가 몹시 노쇠하여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형편에 이르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가 빠져 음식을 씹을 수 없고, 도무지 타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데다, 시야까지 트릿해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런 신체기능 장애로 미루어 곤란한 지병도 없지 않은 상태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번에 동정의 심정이 충만하였는데, 그런데 우리는 4, 5, 6, 7행, 화자의 태도와 말이 거슬린다. ‘어린 시절 장딴지에 호된 매를 치던/기개는 어디 갔는지’라니. 우리는 이를 있으나 마나한 이치의 진술로 여기며 간과하기보다는 필요하지 않는 질문 비슷한 진술로 간주하며 게다가 그 어조에 대상과 거리가 개재되어 있고 경시하는 듯한 태도도 함축되어 있다고 의심하며 언짢아질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늙지 않나. 그 누구도 이윽고 늙지 않나 말이다. 젊은 시절의 ‘기개’가 사라지는 건 그저 노쇠의 기운과 같이 당연하기만 한데, 대체 ‘어디 갔는지’라고? 어딜 가기는 어딜 갔겠나. 화자 그대의 ‘어린’ 시절부터 그대의 ‘장딴지’에 지금도 그 흔적이 완연한 붉디붉은 사랑으로 스며들어 쌓여 있겠지. 게다가 ‘옛 부모 얼굴’ 운운하며 쓸데없이 생소하게 여기며 대놓고 남처럼 ‘두 늙은이’라고 막 지칭하고, ‘내 미래의 모습으로 칭얼대신다’고? ‘내 미래의 모습’을 상기하는 건 그렇다 치고, 그 하소연을 자식에게 털어놓는 그 우울하고 아리기만 한 탄식을 ‘칭얼’댄다라고 하다니.
8-13행 진술에서 우리는 감응은 더욱 복잡해진다. 화자가 유아 시절의 ‘똥오줌’ 관련 국양(鞠養)을 상기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그 감사에 관련되지 않고 ‘빚’으로 인식하고 있고, 하필이면 갚아야 할 ‘채무’라고 생각하기 있기 때문이다. 대체 어느 부모가 ‘채권’이라고 여겼고, 또 여기고 있다는 건가? 그것을 ‘채무’라고 하는 건 부당한 왜곡이며 모욕에 가깝다.
우리는 점점 점증하는 불만에 시달리다가 추후 노쇠 부모를 돌보는 일을 ‘짐승만도 못한 고생길’로 규정하는 언급에 이르러선 폭발할 지경에 이르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그 터질 듯 울울한 기운이 급작 하강한다고 감지하게 된다. ‘우리가 사람이어야 하기에/외면치 못할 막바지 사람 도리가/널려 펼쳤다’를 읽고서.
화자는 내가 아니라 분명 ‘우리’라고 하면서 외면하거나 기피해서는 안 되는 ‘우리’가 직면하였다는, 그것도 돌이킬 수 없게 당면하였다는 취지의 어조로 언급한 ‘사람 도리’는 14-17행에서 알 수 있듯, 스스로 돌볼 수 없는 부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도리’에는 이미 직접 모셔야 한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바꿔 말해 부모를 요양원에 보낼 수 없다는 의사가 행간에 병렬되어 있다. 만약 요즘 추세처럼 요양원에 보낸다는 방안이 어떻게 할 것인가에 포함되어 있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문제를 설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14행에서 화자는 자신의 부모가 ‘뺑덕어멈 같아 미웁기도 하고’ 하였는데, 이 진술은 ‘앞이 흐릿하니 네가 누구냐’에 포함되어 있던 치매 증세로 심술궂어진 부모를 현상대로 언급한 표현이며, 자신의 상황을 ‘심 봉사 같이 공양미 삼백 석을/되갚아야 할/인당수 깊은 선택이 눈앞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맥락에는 자칫 눈멀 자신을 비판하는 자의식과 자신의 부모를 ‘심청’에 비기는 직유가 포함되어 있어, 우리의 인식을 경신하고 있다. 「심청전」의 캐릭터와 모티프를 창의로 변용하고 주목을 끌게 한 면모와 서서히 정립된 메시지가 이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시의 화자의 특성도 간과하지 말자. 자신을 일면을 포함하여 노쇠한 부모를 대충 조치하려는 세태를 부각해 풍자하고, ‘우리가 사람이어야 하기에’ ‘외면치 못할 막바지 사람 도리’를 환기하고 있다. ‘인당수 깊은 선택’이라 하여, 우리를 깊게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런 시가 늦게 출현하여 유감스럽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요양원을 그냥 보통 일반시설로 취급하고 있는데, 올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대만에서는 노인들이 자신이나 자녀의 집에서 돌봄서비스를 받고 있고, 전체 노인 10% 정도만 요양 시설을 이용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