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44)] 진순분 '장독대 설법'
장독대 설법
진 순 분
비 오면 오는 대로 비를 맞는 섭리인 듯
눈 오면 오는 대로 눈을 맞는 순리인 듯
장독대 보살들 모여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천에 숨 헐떡여 고비 넘는 뙤약볕에
국화 향기 숨결로 스며드는 갈바람에
오로지 익어가는 일
화두 참선 깊어진다
길고 긴 엄동설한 맵고 짠 결이 삭듯
배불뚝이 헤벌쭉이 도반들 수행하는
동안거 묵언의 설법
별빛 총총 귀 연다
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을 뜻하는 보디(bodhi)와 생명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유정(有情)을 뜻하는 ‘사트바(sattva)’가 합쳐진 ‘보디사트바’를 음사(音寫)하여 표기한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이라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다면 보살은 그 본디 정체가 유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장독대 보살들 모여/가부좌를 틀고 있다’고 하였다. 장독대는 분명 유정이 아닌 무정(無情)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금동으로 주조하거나 나무 혹은 바위를 쪼아 새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등 숱한 부처님들이 있지 않은가. 분명 금동이나 나무 그리고 바위는 무정이다. 그것들에 불심을 새겨 마음으로 받아들임이 부처의 뜻을 따라 걷는 게 아닐까. 그 무정들은 섭리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렇듯 ‘비 오면 오는 대로 비를 맞는 섭리인 듯/눈 오면 오는 대로 눈을 맞는 순리인 듯/장독대 보살들 모여/가부좌를 틀고 있다’
수행에는 필연적으로 고행이 따르기 마련이다. ‘염천에 숨 헐떡여 고비 넘는 뙤약볕에/국화 향기 숨결로 스며드는 갈바람에/오로지 익어가는 일/화두 참선 깊어진다’고 하였다. 장독들은 제 몸에 장을 담고 뜨거운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오로지 ‘익어가는 일’을 화두로 하여 참선 중이다. 불전에 모신 관음보살과 같은, 금·은 주옥을 끼운 보관(寶冠)도 없다. 천의(天衣)로 몸을 감싸지도 않았다. 그저 배가 불룩한 맨몸에 그래서 어찌 보면 헤벌쭉이로도 보이는 장독대 도반들이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길고 긴 엄동설한 맵고 짠 결이 삭듯’ 수행 중이다. 그리고 마침내 장독들이 긴 ‘동안거’ 끝에 빛을 발하는 ‘묵언의 설법’에 별빛까지 감응하여 총총 귀를 여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장독이 베푸는 보시(普施)로 오랜 세월 연명을 하였다. 거의 모든 먹거리가 그렇게 변했듯 장도 담그기보다는 마트에 가서 사다 먹는 그래서 우리네 살림 근처에 장독대가 사라진 지 오래인 오늘이 과연 순리와 섭리에 맞는 삶인가를 생각해 본다.
아울러 이 시는 올 2월 15일에 발간한 『수원 詩人』 11집에 실린 시임을 밝힌다. ‘2024 수원시인상’을 수상하게 된 시인의 수상작 중에서 한 편을 골랐다. 오는 토요일 2월 15일에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발간기념회 겸 시상식이 있다. 지면을 빌려 진순분 시인에게 수상을 축하한다는 뜻을 전한다.
진순분 시인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한국시조』 신인상 당선.
시집 『익명의 첫 숨』 『돌아보면 다 꽃입니다』 『블루 마운틴』 『바람의 뼈를 읽다』 『안개꽃 은유』 등
- 가람시조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경기PEN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 본상, 올해의시조집상, 수원예술대상, 홍재문학상, 나혜석문학상, 경기도문학상 본상, 한국시학상 본상, 시조시학상 본상, 수원문학상 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