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14)] ‘언제부터인지 서가에 서면’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지난주에 이어, 작년에 고민 끝에 버리기로 하였다가 그러기를 잊었던 거실 구석의 11년 전 발간 시 전문 월간지의 하나를 폈다가 다음 시를 마주하였고, 거듭 읽었다.    

 언제부터인지 서가에 서면 책들이 낯설어한다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책꽂이에 틈새가 없을 만큼 책의 식구들을 늘였다

이제는 책이 책을 거부한다

언제 입양되었는지 제 주인도 모르는 전집류들이 아직도 반 지하 같은 서가 밑자리에서 퇴출을 기다리고 있다

몸무게 가벼운 시집들도 제 몸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 벽돌을 쌓고 있다

월간지는 며칠 노숙하다가 폐지 손수레에 몸을 던진다 지금 당당히 입주해있는 저 책들은 언젠가는 서가 밖으로 호명돼 나갈 것이다 

 

 책들이 쓸쓸하다는 것은 책이 위태롭다는 뜻이다

책이여, 더는 네 몸을 덮지 마라 네가 있어 행복했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 무소유의 언어, 따스한 희망 한 접시 나의 안에 또 다른 서가를 짓는다

서가에 서면 왠지 나도 철 지난 월간지처럼 나를 버리고 싶다

       - 「서가 앞에서」/이광석

 

 이 시를 읽으며 우리의 대다수는 이 시의 상황과 화자의 심정에 거리를 거의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러 이유로 책 시장이 우리 인구 줄듯 하염없이 줄고 있고, 우리가 걱정도 하고 있는데, 이보다도, 각기 시차와 다른 사정이 없지 않겠지만, 우리는 우리 서가의 책들과도 데면데면해진 자신을 각성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서가에 서면 책들이 낯설어한다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다’란 화자의 진술에 공명하며, 그러다 뭔가 미진하여, ‘언제부터인지 서가에 서면 나는 책들을 낯설어한다  낯설기는 책들도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힐책하듯 고쳐 읽으려하다가, 황급히 중지할 것 같다.

그렇다. 우리 서가의 책들은 우리가 한때 의지와 사연으로 선택하였거나 지인들이 청람(淸覽)을 바라며 성의로 보내온 감사한 책들이 아닌가. 접수 그때와 달리 응분의 통교를 차일피일 미루었기 쉽다. 이 사정은 둘째 행 ‘한때는 책꽂이에 틈새가 없을 만큼 책의 식구들을 늘였다’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또한 ‘언제부터인지’ 서가의 용량에 따라 책들을 버려오기도 하였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 또 이어지는 ‘이제는 책이 책을 거부한다’는 진술이 단순한 수사이며 책들로 하여금 서로 거부하게 한 주체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인정한다.  

 3행 이후에는 책들의 그 불길한 운명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한때, ‘네가 있어 행복했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 무소유의 언어, 따스한 희망 한 접시’였던 책들.

이제 애꿎게도 ‘입양’ 취급되고야 마는 전집류는 조만간에, 아마 책장의 가로 칸막이와 책 사이에 가로 뉘인 채  쌓이고 있는 ‘몸무게 가벼운’[하지만 내용은 절제와 함축으로 무겁기만 한] 시집이 그 다음에,  어제나 오늘에 이미 책장 밖으로 내쳐진 월간지들은 ‘며칠’ 후 영구 ‘퇴출’될 운명이다.[‘폐지  손수레’로] 

 서가에 잘 보관되어 있는 책들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지금 당당히 입주해있는 저 책들은 언젠가는 서가 밖으로 호명돼 나갈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왜 이렇게 말하나. 급기야 자신이 ‘책들’을 버릴 것이면서도 마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누가 책들을 ‘호명’하여 퇴출을 집행할 것이라고 하나. 또 왜 둘째 연 첫 행에서 ‘책들이 쓸쓸하다는 것은 책이 위태롭다는 뜻이다’는, 필요 없는 언급을 굳이 추가하나. 개인의 뜻이나 필요가 아니라 그 이상, 이 시대 4차산업혁명의 추세가 가중되며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라고 화자는 우리와 함께 변명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저무는 종이책 시대를 맞았지만 그러기 싫은 유감과 미련을 이기지 못하고 자책도 하면서. 

 그런 회포를 11년 전에 토로한 이 시. 앞에서 소개하며 ‘거듭 읽었다’고 했는데, 이 시의 메시지가 서재의 책들과 우리의 별리 경향 관계를 넘어선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화자는 끝으로 쉽지 않은 토로를 하였다. 이상 사정과 사연을 총괄하여, ‘서가에 서면 왠지 나도 철 지난 월간지처럼 나를 버리고 싶다’고. 

 우리는 이 자기방기 토로와 관련하여, 먼저 화자가, ‘행복했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 있고, 지금과는 달리 청춘시절 지향하였던 ‘무소유의 언어’, 그 실체였으며, 암울한 미로의 비어있는 찬 식탁에서 빛나던 ‘따스한 희망 한 접시’와 같았던 그 ‘책들’을 ‘퇴출’하였거나 퇴출을 시도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그 처지를 거듭 재고하여야 한다.

한때의 자신이거나 분신을 버리게 된 그 연장으로, 화자는 자신의 미래, 그 종국도 결부시켜 성찰하고 만 것이다.  나의 ‘책들’처럼 언젠간 이 세계 이 일상에서 나도 버려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미리 내가 나를 버린다고 하여도 크게 잘못이거나 과장이거나 나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화자는 유감스럽기만 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화자는 자신과 우리에게 이미 또한 시사하였다. 우리의 ‘책들’처럼 우리도 이 세계에서 ‘퇴출’될 운명은 새삼 유감스럽기도 하지만 그저 한낱 숙명의 이치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화자의 그 표명 직전에 개재한, ‘책들’에게 바친 자신의 직접 변명이자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는 진술, ‘나의 안에 또 다른 서가를 짓는다’, 즉 버렸거나 버릴 ‘책들’을 새로 보관할 ‘서가’를 마음에 조성하겠다는 서약 성격의 다짐을 경청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서가는 우리를 두루 각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