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46)] 전대호 '다소곳이'
다소곳이
전 대 호
절집 마당에
비질 자국
다소곳이
노 저은 흔적
이승을 건너는
조각배.
오늘은 24절기 중 그 세 번째인 경칩이다. 경치의 ‘칩(蟄)’은 겨울잠을 자는 벌레를 뜻하는 글자이다. 그야말로 산과 들의 온갖 초목에서 싹이 돋기 시작하고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미물들이 그 봄기운에 놀라서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날이다. 그런데 막상 날씨는 영 아니다. 본시 꽃샘추위가 앙칼지다고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폭설로 학생들의 입학식이 취소되기까지 하였다니 말이다.
전대호 시인이 이 시를 쓴 절기는 모른다. 그냥 시에 취해 춘설이 다소곳이 쌓인 절집을 머릿속에 그려볼 뿐이다. 시의 제목이 ‘다소곳이’이다. 눈도 함박눈이 펑펑 내려 쌓인 것이 아니라 다소곳이 소복소복 쌓였으리라. ‘절집 마당에/비질 자국’이라고 했다. 절집 마당에 쌓인 눈을 쓴 이는 누구였을까. 행자승이었을까. 아니면 불목하니 아니면 공양간 보살님의 고운 눈매였을가. 이도 저도 아니고 요사채 아랫목에 가부좌를 틀고 계시던 노스님이 기지개를 켜고 심심풀이 파적으로 비질을 하신 걸까. 아무튼 사나운 비질이 아니라 다소곳이 쓴 자국이다. 사나우면 상처를 남기기 쉽다. 절집 마당에 쌓인 눈이라도 고운 마음으로 쓸어야 한다.
시의 본문을 전부 합쳐야 27자밖에 되지 않는 3연 2행의 지극히 절제된 시이다. 어느 한 글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참신하고 기발하다. 쌓인 눈을 스쳐 지나간 빗자루 자국이 ‘다소곳이/노 저은 흔적’이라니. 노를 저어간 흔적이 있으면 그 힘에 실려 흘러가는 배 또한 분명 있으렷다. 아, 있다. ‘이승을 건너는/조각배.’이다. 생각해보면 중생 중에 사바에 정처 없이 떠 있는 조각배에 실린 존재가 아닌 자가 있을까. 이승에서 덕을 쌓고 또 쌓아야 저 피안의 언덕에 그 조각배를 댈 수 있는 것이다.
경칩이 지나니 늦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며칠이다. 그 절집 마당에도 꽃이 피고 섭리대로 꽃잎이 이울어 지리라. 가을이 오면 낙엽도 쌓이리라. 그러면 누군가가 또 빗자루를 들지도 모른다. 다소곳이 노 저은 흔적을 생각하는 이른 봄날 저녁이 평온하다.
전대호 시인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 <가끔 중세를 꿈꾼다>(1995), <성찰>(1997) <지천명의 시간>(2022), <내가 열린 만큼 너른 바다>(2024)
저서: <철학은 뿔이다>(2016), <정신현상학 강독 1>(2019), <정신현상학 2>(2021)
번역서: <위대한 설계>, <로지코믹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