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15)] ‘속초행 고속버스표 두 장’
우리는 현재의 사물에 직면하고 내일을 내다보며 생활하며 자신의 지난 삶을 잊고 산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오늘에 우리의 지난 과거가 작고 크게 점철되어 있다. 우리는 오늘의 일상에 연계된 어제의 일상을 떠올리며 조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문제와 유관하기도 하고 무관하기도 한 먼 과거의 장면을 불쑥 떠올리고 있다. 일상에서 그 계기는 다양하며 역시 의도와도 무관하기도 하고 유관하기도 하게 솟은 기억에 우리는 칠정으로 감응한다. 그 시간은 짧고 유동(流動)하는 의식과 현재의 사무로 하여 그 기억은 대체된다. 아니 다시 이전처럼 가라앉는다. 또 11년 전에 발간된 한 시 전문 월간지에서 읽은 다음 시에는 오래 가라앉았던 한 옛 기억이 어디서 ‘툭 떨어’지듯 화자에게 출현하고 그 회포가 진술되어 있었다.
책의 갈피에서 오래된
속초행 고속버스표 두 장이 툭 떨어졌다
흐릿하게 남아 있는 좌석 번호
한동안 펼쳐보지 않았던 책이
참 오래도록 한 여자와 남자를 품고
입 다물고 있었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몸 깊이 숨기고
빈틈없이 서로에게 스미고 싶었을 것인데
손가락 사이사이 가장 깊은 곳을 맞추고
단단히 빗장 걸어두고 싶었을 것인데
어깨에 기댄 머리를 베개 삼아
오래도록 깨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인데
속초 앞바다 파도소리에 갇혀
파삭 낡아 있는 두 개의 잎사귀
어디로도 나를 데려다주지 못하는
- 「기억」/강호정
1연에서 화자가 어떤 책을 펼쳤다가 그 한 갈피에서 우연히 낡은 ‘속초행 고속버스표 두 장’을 발견했다며 관련된 옛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마 그 책과 차표를 그동안 화자가 사뭇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보관으로 미루어 가끔 의식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때로는 외면하고 때로는 매이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한동안 펼쳐보지 않았던 책’이란 진술은 사실 토로이겠지만, 이루지 못했던 그 옛 사랑과 사연을 가끔 그 책처럼 ‘입 다물고’ 회상하였을 것이라고. 화자는 그러니까 ‘참 오래도록’ 옛 ‘한 여자와 남자’를 역시 그 책처럼 ‘품고’ 있었다고.
이러한 추정은 호사 취향에서라기보다는 그 다음 연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밀도 높은 사랑의 희원(希願), 그 진솔한 묘사와 함축된 애정이 깊은 동정을 조성하는 2연. 우리는 부드럽고 강인하기도 한 그 연정(戀情)에 제대로 감겼다가, 드디어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속초행이 무산되었다고 해서 속초행으로 기약한 사랑의 세목들이 미수에 그쳤다고 할 수 없다고. 당시에 두 사람은 서로 ‘스미고 싶었을 것’이 아니라 이미 ‘스미고’ 있던 하나였고, 외부의 어떤 제어에 맞서 서로 손가락으로 손가락 사이 모두를 메꿀 만큼 ‘빗장’을 ‘걸어두고 싶었을 것’이 아니라 이미 조금도 빈틈없이 ‘빗장’을 ‘걸어’둔 결속의 상태였다고.
우리는 그런 추정을 6행 ‘어깨에 기댄 머리를 베개 삼아/오래도록 깨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인데’를 음미하면서 더욱 미련을 갖고 시도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그 기존 상태와 다른 상태를 불각(不覺)하고자 하는 진술이 이어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 시행에서 그 사랑이 어떤 외부 요인으로 하여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바로 그런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속초행’을 작정하였고 차표까지 마련하였다고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행에는 ‘오래도록’이란 한시(限時)의 전제가 있고 그 사랑이 일종의 꿈과 같았으며, 결국 그 꿈에서 깨어났다는 각성의 탄식이 미묘하게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 이들의 사랑을 방해한 구체 이유가 무엇인가. 궁금하다면 우리는 널리 알려진 톨스토이(1828~1910)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를 원용하여 저마다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을 3연이 제어한다. 3연은 우리를 빨리 시로 돌아오게 하는 힘이 있다. ‘속초 앞바다 파도소리’. 사랑을 상실한 후일 어느 날에 화자는 홀로 ‘속초’에 가서 그 ‘앞바다’에 섰고 혼자 들었으리라, ‘파도소리’를. 그러나 그 ‘파도소리’는 이전에 기대한 소리일 리 없다. 화자가 변전하였듯 이제 그 파도소리는 실패한 그 사랑과 회한을 일깨우는 음향이었을 것이며, 일찍이 책 속으로 옮겨졌던 차표에 어느덧 배어들었고 책을 따라 역시 ‘입 다물고’ 있는데, 화자의 귀에만은 생생할 것이다.
이제 ‘어디로도 나를 데려다주지 못하는’ ‘파삭 낡아 있는 두 개의 잎사귀’(‘속초행 고속버스표 두 장’), 바로 그래서 그것은 또 언젠가 다시 화자의 뇌리에 ‘툭 떨어’지듯 회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