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럽지만 쉽게 읽히는 시가 있고 여러 차례 읽어도 시행의 의미와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있다. 시 감상에서 늘 직면하는 이 문제에서 쉽게 읽힌다고 해서 그 뜻이 깊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 뜻이 꼭 깊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이미 두세 번 언급한 대로 시의 언어가 어려운 이유는 시 장르의 특질인 언어경제에 연원한다. 함축과 내포가 개재되어 애매모호성이 유발될 수밖에 없고, 게다가 비유와 상징, 반어와 역설과 알레고리가 구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가지 뜻으로만 인지되어야 하는 신문 기사나 법조문(法條文) 등 일반 산문에서처럼 설명하려 하지 않고 가능한 한 표현하려 하면서 독자의 참입과 해석, 그리고 공감과 동의를 기대한다.
같은 취지의 연장에서 예술작품 전반에 적용되지만 시 역시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적극 사양하며 새 경지를 개척하려 한다.[참고로 술이부작의 기본 취지는 개신(改新)을 거부하며 답습을 추종하자는 답답한 고수(固守)가 아니다. 선현의 훌륭한 말씀을 근거가 미약하면서도 함부로 문제시하는 경망이나 결국 졸견에 불과한 자만의 이견을 즐겨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제의 미덕을 강조한다.]
사석에서 언급되는 시가 어려워지는 이유의 하나로, 막중한 시의 전통과 섬부(贍富)한 집적이 끼치는 부하가 있다. 기라성 같은 시의 선인 선배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인생과 세계의 거의 모든 주제를 게다가 다양한 각도로 이미 다루어서 기존에 없던 태도로 새로운 전망을 시도하기 어렵고, 무슨 성찰을 해도 알고 보면 기껏 기존의 중복에 불과할 우려가 있어 변화나 전복을 추구하다가 혹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의 어려운 시가 이 추정에 연관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리 있다면 우리는 다시 상기 시의 특질로 또 되돌아가서 이 문제를 살펴야 하지 않나 싶다. 특히 비유 상징 반어 역설 알레고리 등을 주목하고 그것들만이라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출현이라면 우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진경(進境)으로 수용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들이 새롭다면 그 자체가 우리의 주목을 끌뿐만 아니라 우리의 메시지 수용도 범상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에서 우리의 감각이 신선해지면서 메시지도 인식 경신되고 또 심화되기도 한다. 다음 시를 읽다가 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생각은 개연성이 있어 이미 여러 분들이 격식을 갖추어 충분히 논의했을 수 있다.
사내는 말했네
아무도, 죽음을 본 사람은 없었읍죠
보고 나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읍죠.
아무도, 천국을 본 사람은 없었읍죠
보고 나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읍죠.
모두 주문을 외며 천국을 그리워 했을 뿐
그래서 무대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보았을 뿐.
수세기 죽은 몸만 보고 또 보았을 뿐
울며 불며 보고 또 보았을 뿐.
먼지의 재
또는
껍질
사내는 말했네
- 「먼지의 껍질」/강은교
‘죽음’과 ‘천국’을 ‘본’ 사람이 이제껏 ‘없었’고, ‘보고 나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관련 시도도 미성에 그쳤을 뿐이라는 탄식이 이어지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며 우리는 동의하지만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죽음’과 ‘천국’은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고 우리 삶을 깊고 넓게 성찰하게 하는 영성(靈性)의 지표이긴 하지만 주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어 우리가 자신의 분수를 잊고 어쩌면 진부하다고까지 느낄 수 있겠다. 우리 주변에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이 있고 천국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어도 일종의 착란이나 환각일 것으로 간주했던 기억도 떠올리면서.
그러던 우리는 이 시의 5연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며 그려보기도 한 ‘천국’이 ‘수세기 죽은 몸’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은유를 만나고, 그 충격으로 동의 여부 이전에 우리의 시선은 동요되고 만다. ‘사내’의 어조도 이전과 달리 침중하면서도 강경하며,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이제야 하고 있다고 느낀다. 문제는 이제 ‘죽음’과 ‘천국’의 실체 여하에서 과연 그러한가로 전이되는 듯하다. 하지만 마지막 연을 읽으면 우리는 그 여부도 잊으면서 우리의 시선은 그 은유에 고정되고 만다. 그 ‘사내’는 또 단언한다. ‘수세기 죽은 몸’은 ‘먼지의 재/또는/껍질’에 불과하다고.
미세해서 눈으로 보기 어려운 먼지, 그 무게가 어떤지 손금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데, 그 불탄 나머지 있는 듯 없는 듯한 ‘재’이거나, 먼지를 둘러싼 그 일부이면서 더욱 하찮기만 한 그 ‘껍질’이라니. 우리로 하여금 거듭 그 형상(形相)에 집중하게 한다. 또 그 형상에 함축된 뜻이 일으키는 파문이 크다. 이 시의 성취에서 요체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쉽게 읽힌다고 하겠지만 주제와 메시지가 크고 깊은 문제작이라고 하겠다.
잘못되었거나 치레 비슷한 신앙의 미망과 허망을 비판하는 이 시에서 우리가 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2, 3연의 4행은 모두 ‘없었읍죠’로 맺는데 그 어미가 독특하다. 이전 신분제 사회에서 하층 계층이 상층 계층에게 쓰던 이 존대어미가 이제는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이 모를 리 없지만 굳이 채택한 것은 이 시 ‘사내’의 성격 형상화에 꼭 필요한 의장(意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죽음을 본 사람은 없었읍죠’는 ‘아무도, 죽음을 본 사람은 없었지요’와 분명 대조된다. ‘아무도, 죽음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와는 더욱 그 이질(異質)의 차이가 크다.
2, 3연의 어투와 다른 연들의 어투가 서로 다른 국면을 연속 주목하며 2, 3연의 화자와 이외 연들의 화자가 다른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즉 2, 3연의 화자는 ‘사내’이고(이 시의 화자가 인용 소개하고 있지만), 4, 5, 6연의 진술 주체는 1연과 7연에서 거듭 ‘사내는 말했네’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피력하는 이 시의 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