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48)] 홍문숙 '냉이꽃'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냉이꽃

                       홍 문 숙

 

약속이나 했을까

몇 무리 사연이 일제히 깨어난

논두렁이 환하다

겨우내 실뿌리 하나씩 딛고 버텨온,

나는 고요해지고 오후는 한순간

나보다 빨리 봄의 현기증 속을 내달리는

방금 전의 논두렁들

냉이꽃을 만나는 일은 어머니를 돌아보는 일이다

내 가슴의 문서에는 냉이꽃이 있다

언 땅을 녹이며 피어나는 수수한 이름

완전한 사랑이라 했던가

 

내 어머니도 평생 저처럼

후미진 등 뒤에서 피어나곤 했지

봄날 보일 듯 말 듯 비가 오는 날이면

문득 다가서고픈 내 사랑 하나 있다

 

세월 따라 입맛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네 입맛에 변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매년 봄이 시작될 무렵 밥상에서 만나게 되던 봄 내음 가득한 된장국이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에 겨우내 김칫국 아니면 된장국이 늘 변함없이 올라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된장국이 식구들의 후각을 확 깨운다. 봄이 가까워지면서 서둘러 캔 냉이 덕분이다.

사실 냉이꽃을 회상하기에는 계절적으로는 좀 이른 감이 있다. 냉이를 캐는 일이야 이맘때가 한창때였지만 그 꽃이 피는 때는 사오월이나 되어야 했다. 하지만 봄날은 짧다. 특히 산과 들을 시멘트 구조물에게 넘기고 겨우 회상으로 잠시 짚어보는 봄은 더더욱 짧다. 꿈속의 들에서는 곧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쟁기를 끄는 워낭소리에 노고지리 노래도 촉촉한 봄하늘에 꽃수를 놓을 것이다. 좋은 시를 만났으니 꿈으로나마 한번 흥건히 봄에 젖어 보자.

‘약속이나 했을까/몇 무리 사연이 일제히 깨어난/논두렁이 환하다’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인계동 망두산 아래는 온통 논이었다.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수리조합 냇물이 흘러 장다리 내로 이어졌다. 그 논길을 가득 메운 하얀 냉이꽃 꽃무리에 논두렁이 다 환한 것 같다. 

‘겨우내 실뿌리 하나씩 딛고 버텨온,/나는 고요해지고 오후는 한순간/나보다 빨리 봄의 현기증 속을 내달리는/방금 전의 논두렁들’ 

이 들녘에서 생명을 지닌 것들치고 끈질기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었을까. 모진 눈보라가 할퀴고 지나갔어도 실뿌리 하나로도 넉넉히 버텨온 목숨들이다. 시인은 그중 ‘냉이꽃을 만나는 일은 어머니를 돌아보는 일이다’라고 한다. 어머니의 일상, 그리고 그 삶 전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내 어머니도 평생 저처럼/후미진 등 뒤에서 피어나곤 했지’라며 회상한다.

어느새 춘분이다. 보름 후에 오는 다음 절기가 청명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가랑비가 산과 들을 적실 무렵이다. 시인은 ‘봄날 보일 듯 말 듯 비가 오는 날이면/문득 다가서고픈 내 사랑 하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다가서고픈 사랑은 무엇보다 이제는 이 세상에 아니 계신 어머니일 것이며 또 무수히 그리운 이름들이리라

이제 도시에서는 바구니를 들고 냉이를 캐는 봄처녀를 만나는 일은 아예 기대할 수가 없다. 수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래도 아직은 매년 이즈음에 수원천을 따라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소보록하게 무리 지어 자리 잡은 냉이와 그것들을 심심풀이 삼아 한 옴큼씩 캐는 여인네들을 만날 수 있다. 오는 일요일에는 광교산 치맛자락이 끝나는 자리에서 수원천을 따라 화홍문까지 소요해 볼 생각이다. 그 옛날 논길을 밝히던 냉이꽃을 그리며

 

 

홍 문 숙 시인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귀향(歸鄕), 직립의 휴식』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