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에서 안동으로 번진 산불이 지난 3월 25일(화) 오후에 고향 임하면 신덕리도 휩쓸고 지나갔고, 그 와중에 옛집과 양조장이 불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 시간에, 향수(鄕愁)는 “설과 추석의 귀향만으로는 그 근심 같은 그리움이 해소되지 못하고, 어떤 계기를 맞아서는 그 미진이 증폭되기만 한다”고 하고, “그 모티프는 다양한데, 다음 현대 한시(漢詩)에서는 ‘꾀꼬리 소리’”라면서, 아버지 김시박(金時璞 : 1919-1999)과 교유했던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 1925-2017) 선생이 토로한 밀양 퇴로리 서고정사(西皐精舍) 향수를 우선하며 관련 칼럼을 쓰고 있었다.
유사 이래 없었던 재변(災變)이 일어난 그 주 주말에 형님과 아우와 셋이서 죄인 아니 죄수의 심정으로 고향을 다녀왔다. 10대 이래 귀향을 셀 수 없이 거듭하였고 낮은 기말성적표나 고교입시 실패, 집안 상고 등으로 우울한 귀향도 많았지만, 그래도 가슴 한편에는 늘 고향 경물과 사연을 상기하며 설레었는데, 전날 밤에 어지러운 꿈을 길게 꾸었고, 떠나기 직전까지 갈까 말까 망설이기도 하였다.
500여 년 이전부터 당고개라 불리는 작은 재를 넘어 마을에 들어서서 이윽고 오른편 내 향수의 모티프인 임하양조장에 이르렀다. 옛집으로 가려면 거쳐 가야 하는 주막거리의, 젊은 아버지가 해방 전후에 운영했던 양조장. 아버지를 따라 안동시 당북동에서 이 마을로 이사 오던 1965년 4월 어느 날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일단 멈추어, 처음 바라보았었다. 이후 1967년 가을에 서울로 전학 갈 때까지는 물론이고, 적어도 아버지가 별세한 1999년까지 우리 10남매가 드나들며 갖가지 추억을 쌓은 공간이며, 이후에도 우리 남매가 지나갈 때마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반겨주었던 고향의 정표(情表).
옛 임하면사무소 공터에 차를 세우고 화마가 달려 내려온 능선과 마주하였다. 왼쪽에서 길게 이어져와 오른 쪽 아래로 꺾여 양조장 뒤에 이른 능선에는 흙과 나무가 온통 검었다. 예상했지만 이런 처참하고 기이한 정경을 마주할 줄이야. 오른 쪽으로 고개 돌려 뒤틀린 검은 흉상(胸像) 같은 양조장의 무너진 잔해를 마침내 보았다. 부속 사옥, 양조 시설, 사무실, 창고 등이 이리저리 쓰러져 얽혀 있었고, 그때에도 서까래에서 흘러나오는 연기가 우리 형제의 눈을 감게 하였다.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막상 이런 모습에 부딪히자 봉행을 수락했던 제행무상(諸行無常)도 심금을 위로할 수 없었고, 가슴에서 정체불명의 불길이 솟았다. 이 양조장은 1920년 전후부터 전 외조부 권대선(權大銑 : 1891-1941) 씨가 운영하였고, 1937년에 아버지가 결혼하여 이 마을로 이주하여 여기서 서기로 일하였다. 1941년에 전 외조부가 별세하자 아들들이 어렸던 전 외조모는 양조장을 아버지에게 매도하여 아버지는 1955년까지 그 운영에 직접 투신하였다. 이후 아버지가 이 지방의 정치에 본격 종사한 이래 그 이후에도 아버지를 대리하여 서기들이 운영하였다. 1970년대 후반엔가 인근 양조장들과 통합하여 합동 양조장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1945년 이 마을에 지었던 집에 거주하며 1999년 별세할 때까지 최대주주로 양조장을 관리하였으며, 주식을 승계한 큰형이 아버지를 이었다가 2020년에 같이 운영하던 청송 출신 주주에게 지분을 양도하였다. 그러니까 임하양조장은 우리 가계와 100여년에 걸쳐 연분이 이어졌었고, 이번에 불타기 직전에도 옛 모습 그대로였기에 우리 남매의 정서로는 불망(不忘)의 물망초(勿忘草)와 같았다.
불초였던 나는 아버지의 호령으로 고향으로 소환돼 고교 첫 시절을 자전거를 타고 옛집에서 출발하여 주막거리 양조장과 당고개를 지나 포진까지, 어떨 때는 마뜰의 학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졸업하고 다시 고향을 떠나 이후 오랜 세월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부실하고 나태하게 전전하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5.16군사정변과 군정에 반대하며 신덕리로 돌아오던 나이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회오(悔悟)의 시 「붉은 막걸리」를 썼었다.
중년을 넘어선 그는
날마다 안양3동 국민은행 골목 술집에서 석양배
날마다 오시는 황혼에 드리는 인사라네
마주해 한잔 한잔하다
자신도 모르게 성남 가는 태화여객(泰和旅客)에 실리지 실려
외곽순환도로를 질주하는 버스처럼
불타는 막걸리 그 기염으로
청계산 밤하늘에 날아올라
백운유원지를 돌며 주기를 빨아들이고
백헌(白軒) 공 묘소에 가 비문 사연 떠올리고
남한산성과 삼전도도 힐끗 바라보곤
질주하는 버스로 돌아와 모란에서 부려지네
세상에는 봉황과 올빼미만 있지 않고
이도 저도 아닌 자의 변명이 많고 많지
이도 저도 아닌 자의 탄식도 많고 많지
그가 그리워하는 아버지는
초년에 막걸리를 만들었고
중년에 세상을 한 바퀴 돌고는 일찍 집으로 돌아와
황혼 샛강에 호미를 씻고 밤 이슥토록 책 읽었는데
중년을 넘어선 그는
젊은 아버지가 만든 옛 막걸리에 절어 겨우 집으로 돌아가네
아버지는 중년 이후에도 양조장 운영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나 지방정치 참여 이력은 부끄러워하였다. 신덕리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1963년에 쓴 「만포자서(晩圃自署)」(『만포김시박전집』, 제Ⅱ권, 경인문화사, 2012. 251-252쪽)에 그 심경이 역력하다.[한문 원문 생략]
지난 을유년(1945)의 광복은 우리가 크게 각성하여 마음가짐을 쇄신할 일대 기회였다. 그러나 자중하며 실질에 힘쓰지 못하는 가운데 재물을 탐하기도 하고 명리를 좇기도 하고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등 백가쟁명에 중구난방이었다. 그리하여 원망과 비방이 높아지고 삼분사열되어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었으며, 경거망동하면서 공공을 빙자하여 사리(私利)를 추구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 남북분단, 미 군정, 대한민국 수립, 6.25동란, 4.19학생의거, 5.16군사정변 등 연달아 격동을 거치면서 내 반생의 삶은 어언 불혹에서 5년을 더 넘기게 되었다. … 아 안타깝다. 이 모두 품은 뜻과 실제 일이 어긋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할 것인가? … 내게 지난날의 잘못이 세 가지 있다. 전통 유가에서 자랐으면서도 유학 소양을 쌓지 못했음이 첫 번째 잘못이요, 이재(理財)를 등한히 했음에도 사회적으로 크게 이룬 것이 없음이 두 번째 잘못이요, 정치판에 나가서 능력을 시험해보았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이 세 번째 잘못이었다. 지금 세 가지 잘못을 통렬하게 뉘우치며 전원으로 돌아가려 한다. 앞으로는 농사일에 힘을 다하며 내 삶을 마칠 것이다. 이를 맹서하노라. 계묘년 음력 3월 청명절에 만포주인 쓰다.
아버지는 이후 신덕리에서 거주하며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1967년 6월 제7대 총선을 앞두고 3월에 또 공화당이 안동지역 공천을 주겠으니 경북도당의 선거 사무를 맡아달라고 제의하였는데, 아버지는 끝내 사양하였다. 하지만 이후 농촌경제와 양조업이 쇠퇴하고 자란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어린 자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무진 고생을 하였다. 아버지의 속옷에서 누런 땀소금을 보았고,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는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아버지를 따라 소 두 마리를 몰고 30리 떨어진 안동시 용상동 우시장 진흙 창에서 어렵게 소를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야독(夜讀)을 이어나갔고 이런저런 계기에 부응하여 여러 글도 썼다.
우리 남매는 열세해 전에 아버지가 쓴 글을 엮어 『만포김시박전집』[전3권]을 발간하여 세상에 배부하였다. 아 아버지의 주경(晝耕)과 야독의 기지였던 금시서옥(今是書屋) 신덕 옛집, 그 아래채에 남은 300여 부를 보관하고 늘 독자를 기다려왔는데, 이번 산불이 이도 홀연히 불태우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남매의 추억과 향수마저 그러지는 못했다는 것을 산불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