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20)] ‘송사리처럼 하나둘씩/두서없이’
성남 분당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쪽의 운중저수지에서 발원하여, 동쪽 탄천으로 20리 흐르는 운중천(雲中川), 그 천변에도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해, 봄 풍치(風致)가 슬프도록 화사했다. 다음 시가 그 정경을 배경으로 하거나 연상되며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굳이 그렇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내 손바닥에서 노닐던 송사리가
구름 따라 흔적 없이 사라지더군
내 세상도 저와 같다는 걸
힘들이지 않고 보여주더군
세상은 송사리처럼 하나둘씩
두서없이 사라지는 것이더군
떠나가고 있는 것들 속에서
나도 떠나며 손 흔들고 있더군
- 「운중천에서」/이건행
직관으로 감상이 가능하겠으나 이 시를 더 음미하려고 소소한 검토를 하고 싶다. 1연 1행에서 문제의 ‘송사리’가 노닐던 ‘내 손바닥’은 운중천에 담근 화자의 실제 손바닥[우연히 송사리가 그 위에서 노니는]일 수 있고, 힘없는 약자, 즉 무세객(無勢客)의 비유인 ‘송사리’를 더욱 하찮게 하는, 송사리의 좁은 세상을 비유하는 매체일 수 있다. 그런데 전자라고 해도 시의 이후 맥락으로 보아 화자의 자기과시가 아니며, 어느 쪽이든, ‘송사리’가 활동하는 범주가 그만큼 하찮다는 지적만이 아니라 자조(自嘲)의 취지가 은닉되어 있다. 알고 보면 결국 내 무대도 겨우 내 손바닥 크기에 불과하다는...
그렇다면 화자의 자조 정서는 1연 2행 ‘구름 따라 흔적 없이 사라지더군’부터가 아니라, 화자의 첫 발화인 ’내 손바닥에서 노닐던 송사리가’부터이고, 이는 화자의 의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시의 메시지는 3연에서 화자 개인에서 주변으로 은근히 확대된다. ‘세상은 송사리처럼 하나둘씩/두서없이 사라지는 것이더군’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세상’은 2연 1행의 ‘내 세상’과 물론 구별되는 세상이지만 그 성격이 금방 분명하지는 않다. 화자는 그 앞에 ‘사람들의 저 마다의’란 수식을 역시 의도의 하나로 생략한 것이다. 만약 화자가 그 수식을 언급하였다면 독자들의 동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지 못하고 필요 없는 마찰이 작게나마 발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분별없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정신 좀 차려 분수를 헤아려보라는 조소 기운도 배인 각성의 권유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4연 1행에서는 ‘떠나가고 있는 것들 속에서’라고 하여 송사리 운명이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역시 그럴 것이라는 의견을 부각하고 만다.
이 시를 읽고도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되겠다. 무엇보다 먼저 고소(苦笑)하거나 실소(失笑)하면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시공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송사리’와 같을 것이라고. 아무리 분주하게 호흡하며 오대양 육대주를 때마다 왕래하듯 살고 있어도. 그러니까 그때마다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지만 결국엔 ‘구름 따라 흔적 없이 사라지’는 시내의 미물 ‘송사리’와 다르지 않겠다고. 이런 겸허(?!)한 각성은 사실 점점 사람이 가벼워지는 이 세계에서 우리 내면 한편에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수상하게 자라고 있었다고 하겠고, 우리와 밀접하던 주변의 선배들과 유명 인사들이 우리 곁을 떠나 거짓말처럼 고인(故人)이 되고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던 그분들이 우리를 포함해 이 세계로부터 곧 쉽게 잊히는 사례를 많이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새삼 좀 당황해하다가 그 무상(無常)에 반발하는 심정이 공허에서 차오르며 그래서 어쩌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4연 2행 ‘나도 떠나며 손 흔들고 있더군’을 마저 읽고나면, 우리의 송사리 운명에 다시 공감할 것 같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을 직접 대상화하고 운중천의 그 송사리 같이 자신도 홀연히 세상에서 떠나간다고 하면서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고, 떠나가기는 하지만 ‘떠나며 손 흔들고 있’다고 한다. 세상과의 이별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선선하게 용인하는 손짓, 우리는 그 의지의 손짓을 보며, 화자와 화자의 그 ‘나’와 우리 자신을 동시에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질 것 같다. 이 자의식의 자기응시에서, 우리는 나아가 늘 존재하는 세계와 유한한 나의 세상과의 대비를 침착하고 냉정하게 조람하며, 자기 삶의 한계, 특히 내로남불의 양태와 미망도 명백하게 자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시의 2연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삶을 ‘구름 따라’라며 ‘구름’에 연관시켰는데, 이 시의 제목도 그러하지만 불가의 유명한 한 선시(禪詩)를 독자들로 하여금 연상하게 한다. “生也一片浮雲起(생이란 한 조각 일어나는 저 하늘의 뜬구름이고)/死也一片浮雲滅(사란 한 조각 스러지는 저 하늘의 구름이네)/浮雲自體本無實(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고/生死去來亦如然(이 세속에 사람이 왔다 가는 것이 역시 저 구름과 같네)”. 이 시의 맥락을 이은 위 시는 우리가 운중천 같은 시냇가에서 한번 음미해볼 그 한 창의성 파출(派出)이라고 하겠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바로 그 자조의 정서에서 이윽고 자조의 정서를 대체하는 예기치 못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향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악착같은 욕망과 인위의 사업에 구애되고 마는 이 세속의 살이에서 문득 해방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기 때문인가. 그리고 우리는 새삼 이 기분을 계기로 하여 다시 깨달을 수 있다. 송사리 운명을 각성하여야 송사리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운중천(雲中川)의 천변에도 만개했던 벚꽃과 개나리, 이틀 지난 그저께 그 꽃과 잎이 흐리게 내리던 비와 눈에 젖어 땅에 수북 떨어졌고, 가지의 남은 꽃과 잎도 빗물 섞인 눈에 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