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경북 화마(火魔), 내 친구 김 교수의 고향마을도 덮쳤다

김우영 논설실장 / 시인

지난 15일 급작스럽게 안동에 다녀왔다.

사단법인 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한지연) 최호운 회장(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이사장)의 동행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지연은 경북지역 화재 참사가 발생하자 전국 회원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펼쳤다. 모인 성금을 안동시에 전달하기에 앞서 현장을 둘러보자고 했다.

내 오랜 친구의 옛집과 선친이 운영했던 ‘불망(不忘)의 물망초(勿忘草)와 같았’던 임하양조장도 화마에 침범당해 전소됐다. 친구는 연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한 김승종 시인이다.

김승종 시인의 선친이 운영했었던 임하양조장이 전소됐다. 타다 남은 막걸리 병을 들고 있는 이는 최호운 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 회장. (사진=김우영)
김승종 시인의 선친이 운영했었던 임하양조장이 전소됐다. 타다 남은 막걸리 병을 들고 있는 이는 최호운 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 회장. (사진=김우영)

제일 먼저 김 시인의 고향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 임하양조장으로 갔다. 목불인견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산과 마을 곳곳이 불에 타 냇내가 아직도 진동하는 신덕리, 그 한쪽에 폭탄을 맞은 듯 폭삭 주저앉아 형체를 알 수 없는 양조장의 잔해가 있었다.

할 말을 잊고 한참동안 무연히 서 있다가 떠날 무렵 김 시인에게 전화 했다.

내가 거기 있는 게 놀라웠는지 “이게 무슨 일이냐”며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그를 위로한 후 내 모습이 담긴 현장 사진도 보내줬다.

“그대가 신덕리 임하양조장에 서 있다니, 보고도 눈 비비고 다시 보네. 반세기 전 안동고 시절부터 그대에게 쓴 편지 부치고 이르렀던 주막거리 그 양조장...”

김승종 시인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김승종과 나는 동갑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 벌써 반세기가 됐다. 당시 ‘학원’ 잡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서로 연락을 하고 후에 ‘시림(詩林)’이란 동인회를 함께 했으니 참으로 긴 인연이다.

고향에 ‘유사 이래 없었던 재변(災變)’이 일어나자 그는 ‘형님과 아우와 셋이서 죄인, 아니 죄수의 심정으로 고향을 다녀왔다’고 한다. 김승종에게 그곳은 ‘아버지가 별세한 1999년까지 10남매가 드나들며 갖가지 추억을 쌓은 공간이며, 이후에도 우리 남매가 지나갈 때마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반겨주었던 고향의 정표(情表)’였다.

당시의 심정은 수원일보 9일자 ‘김승종의 문학잡설-임하양조장’에 드러나 있으므로 일부만 옮겨 본다.

‘옛 임하면사무소 공터에 차를 세우고 화마가 달려 내려온 능선과 마주하였다. 왼쪽에서 길게 이어져와 오른 쪽 아래로 꺾여 양조장 뒤에 이른 능선에는 흙과 나무가 온통 검었다. 예상했지만 이런 처참하고 기이한 정경을 마주할 줄이야. 오른 쪽으로 고개 돌려 뒤틀린 검은 흉상(胸像) 같은 양조장의 무너진 잔해를 마침내 보았다. 부속 사옥, 양조 시설, 사무실, 창고 등이 이리저리 쓰러져 얽혀 있었고, 그때에도 서까래에서 흘러나오는 연기가 우리 형제의 눈을 감게 하였다.’

임하양조장은 1920년 전후부터 김승종의 외가 쪽에서 운영했고, 뒤에 그의 아버지가 인수했다. 1970년대 후반 무렵 인근 양조장들과 통합해 합동 양조장이 됐다. 아버지는 1999년 별세할 때까지 최대 주주로 양조장을 관리했다고 한다. 주식을 승계한 큰형이 아버지를 이었다가 2020년에 지분을 양도했다. 임하양조장은 김승종의 가계와 100여년에 걸쳐 연분이 이어졌다.

임하양조장을 나온 뒤 사단법인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과 만나 화마가 들이닥친 고운사와 근성서원도 돌아봤다.

‘괴물산불’로 70%가 사라진 천년고찰 고운사. (사진=김우영)
‘괴물산불’로 70%가 사라진 천년고찰 고운사. (사진=김우영)
범종도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깨졌다. (사진=김우영)
범종도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깨졌다. (사진=김우영)

최치원 선생과의 인연이 있다는 천년고찰 고운사는 ‘괴물산불’로 70%가 사라졌다. 전각 30동 중 21동이 전소됐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연수전과 가운루가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불에 타 없어졌다.

불길이 얼마나 강했는지 범종이 깨지고 누각을 받쳤던 돌기둥이 쪼개져 나갔을 정도였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던 고운사는 참혹한 모습으로 변했다. 다행히 대웅보전은 남아 있어서 나와 최호운 회장, 김호태 이사장은 3배를 올리면서 이 아름다운 절집이 옛 모습을 되찾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나마 일행의 마음에 위안과 희망을 준 것은 의성군 근성서원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었다. 근성서원은 조선 개국공신인 김인찬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으로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됐지만 1926년에 현 위치에 복설했다. 사우와 강당, 전사청, 내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장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변은 모두 불에 탔고 심지어는 서원 코앞의 민가도 전소됐으나 이 유산은 멀쩡했다.

지역주민의 헌신으로 화마를 피한 근성서원을 최호운 회장(오른쪽)과 김호태 이사장(왼쪽)이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 전소된 주택이 의인(義人)이 살고 있던 곳이다. (사진=김우영)
지역주민의 헌신으로 화마를 피한 근성서원을 최호운 회장(오른쪽)과 김호태 이사장(왼쪽)이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 전소된 주택이 의인(義人)이 살고 있던 곳이다. (사진=김우영)

이는 한 의인(義人)이 있어 가능했다.

동행한 김호태 이사장은 “서원이 살아남은 것은 한 주민의 살신성인이라고 할 만한 행동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주민은 자신의 집이 불타고 있는 와중에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근성서원에 계속 물을 뿌렸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자신의 집은 전소됐지만 서원은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이에 최호운 회장은 “이런 분이 진정한 의인이다. 그 위험한 상황에서 행한 이타행(利他行)에 국가가 표창과 보상을 해야 한다”며 “올해 전국국가유산지킴이대회에서 이 사실을 모범 사례로 발표해 널리 알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근성서원 처마 아래까지 산불이 쳐들어왔으나 건물은 멀쩡했다. (사진=김우영)
근성서원 처마 아래까지 산불이 쳐들어왔으나 건물은 멀쩡했다. (사진=김우영)

나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내 집과 농기계, 세간살이가 모두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옆 서원의 불을 끌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안동까지 오셨는데 저녁이라도 드시고 하룻밤 묵고 가시라”는 김호태 이사장의 청을 사양하고 돌아오는 길, 간신히 화마를 피해 흐드러지게 핀 안동의 봄꽃들이 우리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