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53)] 이종구 '보리밭'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보리밭

                           이 종 구

 

내 어리던 기억

봄의 어느 날

 

바람이 살랑대는 보리밭 이랑으로

술래 놀이하느라 숨어든 적이 있었지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 이삭들 아래

종달새, 둥지를 틀고

술래 놀이하는 아이들 숨어들고

숙이네 언니도 숨어들고

숨어든 곳곳마다

보릿대를 쓸어 뉜 둥지의 흔적들이 있었지

 

그곳에 누우면 하늘은 파랗게 흘렀지

 

거칠게 뛰는 숨소리 들킬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보리 이삭은 별일 아니라는 듯

바람에 일렁이며 웃었지

 

지금도 

바람 부는 오월이면

내 가슴은

보리밭처럼 푸르게 일렁인다.

 

오월의 보리밭은 이삭이 채 아물지 않았을 때다. 보릿고개의 그 험한 고갯마루를 향해 힘들게 힘들게 오를 때이다. 하지만 그 배고픔도 잠시이고 푸르게 일렁이며 보리까끄라기의 물결이 불러내는 유혹은 참기가 쉽지 않다. ‘내 어리던 기억/봄의 어느 날//바람이 살랑대는 보리밭 이랑으로/술래 놀이하느라 숨어든 적이 있었지’ 따로 불러낸 동무가 있었던 게 아니다. 보리밭이 불렀다. 그래서 모였다. 다 떨어진 검정 고무신 꿰어신고.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 이삭들 아래/종달새, 둥지를 틀고/술래 놀이하는 아이들 숨어들고/숙이네 언니도 숨어들고/숨어든 곳곳마다/보릿대를 쓸어 뉜 둥지의 흔적들이 있었지’

오월이다. 하늘에서 노고지리 노고지리 울던 종달새도 술래놀이를 하는 것을 알았는지 파라락 보리밭으로 날아든다. 아이들도 숨어들고 숙이네 언니도 숨어들었다. 아, 그 숙이네 언니는 누구였던가. 땟국물이 흐르던 옥양목 저고리에 단발머리를 하고 주근깨 내려앉은 얼굴에도 환하게 웃으면 파란 물결이 일렁이던, 그 물결에 가슴이 뛰던. 그때 그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최백호의 노랫말이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하지만 추억은 늙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이 소중하다.

‘그곳에 누우면 하늘은 파랗게 흘렀지’ 누구네 할 것 없이 먹성도 입성도 넉넉지 않던 시절의 동심을 보리밭에 누우면 흰구름 흘러가는 하늘이 어린 가슴을 적셔주었다. 그때만큼은 아무 근심도 없었다. ‘거칠게 뛰는 숨소리 들킬까 봐/가슴이 콩닥거렸지만/보리 이삭은 별일 아니라는 듯/바람에 일렁이며 웃었지’ 그저 술래놀이에서 들킬 염려만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고 그때 웃어주는 보리 이삭이 큰 위안이었던 시절 

‘지금도/바람 부는 오월이면/내 가슴은/보리밭처럼 푸르게 일렁인다.’

우리는 그 보리밭을 다 잃었다. 그래도 그 그리움만은 잃지 않았다. 그래서 ‘푸르게 일렁’이는 오월의 아침을 여는 시 한 편을 읽어 본다. 

 

 

이 종 구 시인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

‘詩發’ 동인

프랑크푸르트 세계도서전 참여

시집 『태어난 새는 날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