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돌을 고였네? 그럼 ‘고인돌’이잖아!”
지금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한때 참 곤궁한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은 커 가는데 벌이는 시원치 않아 아내도 일을 해야 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장모님이 혼자 아이들을 돌봐주시느라 고생하셨다. 천방지축 아이들이 장모님에게 가끔씩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지금도 아이들은 친할머니 할아버지보다는 함께 살면서 자기들을 키워준 외할머니가 더 자주 생각난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그때 나는 확실한 직장 없이 수원문화원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하루는 점심을 먹은 뒤 운동 삼아 팔달산 산책을 하다가 ‘그게’ 눈에 들어왔다.
팔달산 중앙도서관 옆 능선길로 오르다 잠시 쉬어가려고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늦은 봄 솔바람소리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앞날에 대한 고민이 생각을 지배하고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불장난한 흔적이 보였다. 바위 밑에 고여 놓은 돌이 있는 모양이 흡사 아궁이처럼 생겼다. 그래, 여기에 불을 지피면 돌이 따듯해지겠구나, 앉아서 놀기 좋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어? 돌을 고여 놓았다고? 그럼 고인돌이잖아!”
벌떡 일어나 바위를 자세히 살폈다. 주변도 훑어보았다.
고인돌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곧바로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에서 강의를 하던 최호림 박사에게 연락했다.
최 박사는 ‘화성군사’를 만들 때 함께 화성지역 문화유적 답사를 다녔던 인연이 있었다. 몇 달 동안 고인돌을 찾아서 금암동, 외삼미동, 내삼미동, 수청동, 남양읍까지 다녔다. 수청·금암·외삼미동에서는 고인돌 수 십 기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청동 고인돌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금암동 고인돌은 172-1번지 일대와 주변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고인돌이라고 확인된 것은 9기며 2기는 ‘추정고인돌’이다.
금암동 일대도 개발이 진행됐다. 다행히도 오산시는 금암동 고인돌 공원을 조성해 보존하고 있다.
열정이 넘치던 시기였다. 조사를 다니다가 시골 주막에서 새참을 겸해 막걸리를 대폿잔으로 한잔 씩 나누기도 했다. 한잔에도 얼굴이 벌겋게 되어 사람 좋게 웃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몇 년 후 그가 신도시 개발을 앞둔 발굴현장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가슴이 아팠다.
나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온 최 박사는 한 눈에 고인돌임을 알아봤다.
이후 팔달산 고인돌은 조사를 거쳐 학계에 보고 됐다. 이런 사실은 발견자인 나의 이름과 함께 당시 인천일보에도 보도된 바 있다. 팔달산 고인돌은 현재 경기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돼 있다.
팔달산 고인돌은 수원시 팔달구 교동 산 3-1에 위치한다.
그 때는 1기 밖에 없는 줄만 알았는데 1991년 경기도에서 지표조사를 거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팔달산에 총 4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원시립 중앙도서관 동쪽의 산기슭에 2기가 있고, 그 위 쪽 수원화성 화양루 밖 아래에 2기가 있는데 간돌칼(마제석검)도 출토됐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에서 북동쪽으로 3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1호 고인돌은 덮개돌[상석, 上石]이 방형으로 135×135×20∼58㎝ 크기이고 북동 15°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2호는 1호에서 3m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덮개돌의 장축은 동서방향으로 크기는 179×163×20㎝이다. 2기 모두 무덤방[묘실, 墓室] 구조가 지상에서 볼 수 있도록 노출되어 있으나 원래는 개석식(蓋石式)으로 흙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의 모양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3호는 2호에서 산 정상 쪽의 수원화성이 있는 40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고인돌은 약 163×100㎝인 덮개돌이 옆으로 이동되어 흙속에 묻혀 있고, 무덤방이 노출되어 있다. 이 무덤방의 크기는 약 160×25∼30㎝로 매우 좁은 것으로 보아 두벌묻기[이차장, 二次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4호는 3호와 약 3m의 거리에 있는데 방형의 덮개돌 크기는 96×90×50㎝이고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이 고인돌 주변에서 간돌검[마제석검, 磨製石劍]의 조각이 발견됐다.
내가 처음에 본 고인돌은 개석(蓋石:뚜껑돌)과 지석(支石:받침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쉽게 고인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나머지 고인돌의 개석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마도 화성축성 때 성돌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이 글은 ‘중’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