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23)] ‘이승을 떠나려고’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생로병사는 우리 인간의 숙명이고 삶의 전제이지만 정작 평생 반려가 그 종국에 당면하면 남은 짝의 심정은 이루 형언하기 어렵다. 아득한 확산과 터질 듯한 수축을 거듭하는 상실과 애도의 심정에 휩쓸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도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쉽지 않지만 또 꼭 그럴 필요도 없지만 사생일여(死生一如)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자신도 그 누구도 같은 운명이라는 무가내하를 잘 각성하며 이별을 겨우나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의 화자는 아내가 별세하자 먼저, ‘아내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담담한 그 어조에서 보통 이상의 감내 경지를 느끼며 영향을 받는데, 그러나 상중(喪中) 상황에 이목의 옷깃을 여미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화자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그 처지가 되었다면 자신에게는 몰라도 남에게 내핍을 권유하기 어렵다.     

 

아내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로

입관 할 때 몸을 들어 보았다.

평소에 안아보던 아내의 몸이 아니었다.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이승을 떠나려고 몸속뿐 아니라 

몸 밖 인연들마저 다 버린 것 같았다.

다른 세상 다시 못 올 길을 가니까

가볍게 떠나긴 하여야겠지

고승들아 신자들에게

무소유를 법인 양 내세우지 마라.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 다 가벼워진다.

팔십 늙은이인 나도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는 죽음을 느낀다.

변기 물에 가라앉던 똥도 가볍게 뜬다.

   - 「가벼움」/강우식

 

 화자는 작별 의식으로 ‘입관 할 때’ 아내의 몸을 들어 보았’는데, ‘평소에 안아보던 아내의 몸이 아니’게 너무 가벼워 이를 계기로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6, 7행 ‘이승을 떠나려고 몸속뿐 아니라/몸 밖 인연들마저 다 버린 것 같았다’에서 보듯, 이야기의 중추는 ‘인연’이며 그 버리기이기에. 나아가 아내의 몸이 가벼워졌다고 해서 하필이면 모든 ‘인연’을 버려서 그렇다고 여겨졌기에. 

 사람은 죽어가면서 지난 생애의 인연에 더 연연해하거나 미련 끝에 체념하기 쉬운데 화자는 아내가 ‘버린 것 같았다’고 한다. 인연에서 떠나기와 인연을 버리기는 다르다. 마지못한 상태에서이긴 하지만 후자에는 배제와 단절의 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내 곁에서 경과를 지켜보았던 화자이기에 막연한 추정은 아닐 것이며,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에서 화자가 아내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인연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의 단서로 우리의 탄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존재를 이 세속의 시공에서 가능하게 하는 작고 큰 벼리들이 아닌가. 부모와 자식, 남매, 연인, 부부의 연분은 물론이고 동지 은원 등등으로 원하든 원치 안든 우리는 이승의 여러 인연을 엮거나 엮여서 저마다 한 생의 그물을 짠다. 어쩌면 생로병사의 이면에서 우리의 생애를 지배하는 드러나 있으면서도 잠재되어 있기도 한 그 지렛대들을 아내는 드디어 버리고 버린다. 그러니까 아내는 ‘다른 세상 다시 못 올 길을 가’려고, 그 ‘길’을 몸을 가볍게 하여 잘 걸어가려고, 이승에서 맺은 ‘몸속뿐 아니라/몸 밖’의 인연들을 버리고 버렸다고 화자는 연상한다.    

 이 시 10, 11행 ‘고승들아 신자들에게/무소유를 법인 양 내세우지 마라’부터, 이야기는 화자 부부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세상으로, 전환된다. 느닷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확대는 앞에서 아마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 이유로 간주된다. 그런데 동시에 화자는 아내의 인연 버리기를 무소유에 연관시킨다. 이 연쇄는 따지고 보면 가능하지만 그 발상이 비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연도 무소유의 대상으로 부각되다니. 무소유는 과도한 물질 소유를 제어하는 안분(安分)의 절제, 그 지혜가 아닌가. 게다가 그렇게 무소유를 내세우면서도 무소유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정면에서. 즉 무소유는 무슨 도법이 아니라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누구나 다 가벼워진다’며. 그런가. 우리는 잠시 생각하게 된다. 질병으로 사경을 겪으면 아무래도 몸이 줄어들어 ‘가벼워’지고, 무소유는 ‘죽을 때’에만 결부되지 않고  생애에 걸쳐 고려를 거듭해야 할 지침 아닌가 하며. 한편 그 말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념과 정념을 버리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기미도 있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의문은 그러나 14, 15행 ‘팔십 늙은이인 나도 하루가 다르게/가벼워지는 죽음을 느낀다’를 읽으며 희석된다. 화자는 늙어가며 몸이 가벼워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느낀다’고 한다, ‘가벼워지는 죽음’을. 그러니까 인연마저 버린 그 무소유로 가벼워진 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죽음’을 가볍게 느낀다고. ‘변기 물에 가라앉던 똥도 가볍게 뜬다’는 결구에서 우리는 침하하다가 상승하는 자신의 그 가벼운 ‘똥’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도 보며, 화자가 그렇게 언급하는 취지도 인정하고 싶어진다. 끝 모를 암흑의 구멍 속으로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다가 오히려 가벼워서 그 반동으로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똥’. 가벼워진 죽음’의 모습이면서 가벼워진 삶의 모습이 아니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