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팔달산 고인돌은 화성 축성에 사용됐을까?
- 팔달산 고인돌을 발견한 이야기(중)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성벽에 사용할 돌을 인근에서 가져왔다. 이 장소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한다. ‘돌 뜬 곳’을 한자로 이렇게 썼다. 경북 영주 부석사와 충남 서산 부석사 모두 부석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돌을 공중에 띄웠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도 그 옛날 돌을 뜬(캐낸) 채석장이 아니었을까.
팔달산의 고인돌들도 아마 팔달산 어느 곳인가의 부석소에서 돌을 뜨고 다듬어서 만들었을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엔 화성을 건설하는데 모두 87만3517냥7전9푼의 공사비용이 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중 석재가격은 13만6960냥9전(20만1403덩어리)다.
수원엔 부석소가 여러 곳 있었는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은 숙지산 8만1100덩어리, 여기산 6만2400덩어리, 권동 3만2000 덩어리, 팔달산 1만3900덩어리 등 18만9400덩어리다.
가장 많은 8만1100덩어리 돌을 뜬 숙지산 부석소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됐다.
‘화성성역의궤’엔 앞에서 밝힌 것처럼 팔달산에서 1만3900덩어리의 돌을 채취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연한 일이다. 화성성곽이 팔달산을 가로지르고 있는 만큼 가장 손쉽게 채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팔달산의 성벽 돌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떴을 것이다.
그리고 고인돌들도 표면에 노출돼 있어 손쉽게 성돌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고인돌은 팔달산 외에 금곡동과 이의동에서도 발견됐다.
금곡동 고인돌은 칠보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권선구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2009년 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수원박물관 공식블로그인 ‘수원박물관e야기’는 금곡동 고인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수원시 금곡동 칠보산 자락에서 발견이 된 고인돌은 탁자식이다. 밑으로는 굄돌을 받쳐 방을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린 형태이다. 금곡동 고인돌은 택지개발을 하면서 2009년 수원박물관 경내로 옮겨 전시가 되고 있다. 이 고인돌은 밑에는 잘 다듬은 굄돌을 받치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은 형태이다.
금곡동의 고인돌은 그 규모에 있어서, 수원에서 발견이 된 고인돌 중에서는 가장 크다. 무덤방을 만든 굄돌 역시 큼직한 돌로 양편을 큰 돌로 막고, 앞, 뒤로는 약간 좁게 무덤방을 만들었는데, 경기남부 지역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고인돌은 그 덮개석의 크기에 따라서, 고인돌에 순장한 사람의 지위를 가늠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
그런 이유로 본다면 금곡동 고인돌의 경우에는 부락의 촌장정도나 마을에서 지도자격인 사람을 묻은 고인돌로 볼 수 있다. 고인돌의 경우 ‘제단고인돌’과 ‘무덤고인돌’의 형태가 있다고 하는데, 금곡동 고인돌은 북방 탁자식 고인돌임을 알 수 있다.
지난 4월12일 사단법인 화성연구회는 고창으로 봄 답사를 다녀왔다. 선운사와 모양성(고창읍성)을 보고 고인돌 유적지도 돌아봤다.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 너른 면적에 분포돼 있는데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가 집채만 해 처음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북방식 고인돌인 탁자식은 두 개의 큰 돌을 양편에 세우고, 앞, 뒷면은 조금 작은 돌로 문을 만든다. 전국에서 발견된 많은 고인돌의 형태가 덮개돌을 지탱하는 양측의 돌은 그대로 있지만, 문 역할을 하는 앞과 뒤의 돌은 거의 파괴되어 있다.
금곡동 고인돌의 경우에도 발견 당시 양측의 굄돌은 그대로 있었지만, 앞뒤의 문의 역할을 하는 돌은 사라졌고 이전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금곡동 고인돌의 크기는 덮개돌의 경우 길이가 320cm, 폭이 270cm에 두께가 80cm가 되는 부정형의 형태이다. 굄돌은 왼쪽의 받침이 길이 190cm에 폭이 150cm, 그리고 두께가 30cm이다. 오른쪽의 굄돌은 길이가 140cm, 폭이 100cm에 두께는 25cm 정도이다. 고인돌의 높이는 140cm 정도이다.
잘 다듬은 받침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경기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으로 이전 복원하면서 원래 있었던 좌우 받침돌과 동일한 형태와 질감으로 앞뒤 받침돌을 모형 제작하여 보완 설치했다.
이의동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됐다.
광교가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이의동 작은 안골 마을 논 가운데와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서 고인돌이 발견됐고 이 고인돌들은 광교박물관 야외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당시 발굴조사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신석기시대 집터 1기와 야외의 불 땐 자리 2기, 청동기시대 집터 3기도 함께 발견됐다.
*이 글은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