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나를 차에 태우고 먼 길을 와
산기슭에 두고 갔다
몇 번을 짖으며 쫓아갔지만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나는 주인을 알고 있다
주인의 사랑을 알고 있다
더 크게
무위자연이 되라는
주인의 마음이 읽히기 때문이다
산은 높았고 나는 산을 지키기로 했다
- 「개」/이명
이 시를 읽고 진술에서 표명된 뜻을 우리는 수용하다가 무언가 어색한 마찰을 이기지 못해 다시 읽게 된다. 결국, 애매하나마 독자의 인지를 바라는 의도로 진술한 가장(假裝) 허위라고, 즉 3연에서부터 반어가 구사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정 기맥은 이미 1연 ‘주인은 나를 차에 태우고 먼 길을 와/산기슭에 두고 갔다’에서부터 발생하였다. 유기(遺棄) 정황. 그 이후에 무슨 좋은 말이 헷갈리게 이어져도 첫 진술의 영향을 떨치기 어렵다.
이 시는 그러니까 애완을 넘어 반려이기도 했을 개를 무슨 까닭에선지 버리고 게다가 익명으로 자신을 은닉하고 만 우리 일부의 행각을 풍자한다. 화자는 기꺼이 버림받은 개[작중 1인칭 화자 ‘나’]가 되어 이른 바 ‘주인’을 희롱하고 있다. 주인이 자신을 하필이면 ‘산기슭에 두고’간 이유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취지로 그랬다고 미화하며, 자신에게 부디 이 높은 ‘산’에 서 고상하게 살아달라고 당부하였다 하여, 우리의 주목을 끈다. 정황의 진실을 알아챈 우리는 고소(苦笑)하지 않을 수 없고, 겉과 속 두 뜻의 편차가 너무 커선지 주목을 풀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서로 잡아당기는 두 뜻의 인력(引力)이 충돌하고, 우리의 시선도 자못 새로워진다.
이 시는 이런 귀결을 잘 촉진하고 있기에 본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마무리로 다음 국면들을 더 돌이켜 음미하면 좋을 것 같다. 먼저 2연 ‘몇 번을 짖으며 쫓아갔지만/끝까지 따라가지 않았다’이다. 하염없이 따라가기를 중지한 개. ‘몇 번을 짖으며 쫓아’간 건, 자신을 버린 주인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석별 견정(犬情)을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 그 정을 즉각 삭제한다면 주인과 다르지 않겠기에. 이런 부연이 직후 3연 1행 ‘나는 주인을 알고 있다’로 하여 더욱 부상한다. 개는 주인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진작부터 알았기도 하여 ‘끝까지 따라가지 않’은 것이다. 한편 3연 2행 ‘주인의 사랑을 알고 있다’는 시 메시지 전개에서 전후 분기 지점에 해당하면서도 동시에 통합하는 구심 역할을 하며, 역시 서로 다른 두 뜻이 강력하게 응집되어 있다.
5연 ‘산은 높았고 나는 산을 지키기로 했다’. 이 진술에서 ‘산은 높았고’에는 굳이 그 산의 기슭에다 자신을 버린 주인의 ‘무위자연’ 철학과 거리 유기견의 안락사 모면 배려가 그 산처럼 높다고 조롱하면서도 자신이 그 산을 오르기가 어렵다는 뜻이 있어 보인다. 더 미묘한 부분은 직후의 ‘나는 산을 지키기로 했다’이다. 개의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산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산을 지키기로’ 결심했다고? 직전에는 산이 너무 높아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도 있어 보였는데, 이런 후술이 이어지기에 산이 높아서 오히려 그래서 산에 올라 산을 지켜보겠다는 무슨 도전과 승화의 의지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무엇을 지키겠다는 건지도 궁금하고 추정할 수 있지만 독자 여러분께서 이 사설(辭說)에 모두 동의하지 않으시리라. 그래서 변명 한마디 덧붙인다. 하여간 이 모든 진술은 새삼스럽지만 사실 개의 진술이 아니라 이 시대 한 이웃의 토로. 나아가, 애지중지 그 정리(情理)에 여념이 없던 개를 급기야 유기하는 작태를 가족이나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우려하는 우리의 결기 어린 핀잔이기도 하다. 또 어느 때에는 우리가 경청해야 할 고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2014년 1월 1일부터 동물등록이 의무화되었었고, 2025년 3월 현재 개 포함 전국의 반려동물 양육가구 비중은 28.6%이고, 그 수는 약 7700만 마리. 그간 검토를 거쳐 올해부터 10월 4일이 동물보호의 날로 시행되지만, 2024년 7월 집계 매년 유기되는 동물은 약 10만 마리. 동물보호소에서 자연사하거나 열흘 뒤 안락사 되는 비중은 약 45.6%이며, 반환·입양·기증 비중은 39.2%에 불과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