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팔달산 고인돌은 중요하고 위대한 민족의 유산

김우영 논설실장 / 시인

- 팔달산 고인돌을 발견한 이야기(하)

팔달산에서 발견된 고인돌 무리. (사진=김우영)
팔달산에서 발견된 고인돌 무리. (사진=김우영)

수원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수천 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인돌은 절대로 혼자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혜와 힘을 합쳐야 커다란 돌을 떼어내고 운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수원의 역사가 200년을 약간 넘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수원은 삼국시대, 원삼국시대(삼한시대)를 넘어 선사(先史)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고 있었다.

5000여 년 고조선이 세워지기 이전인 석기시대에도 사람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영위했다.

수원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발견됐다. 구석기 시대는 까마득한 옛날, 대략 4만~50만 년 전 시대다.

수원시에서는 파장동에서 외날찍개(긁개)와 주먹도끼 등이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거주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는 그동안 원삼국시대의 제사 유적으로 알려졌던 화서동 꽃뫼 유적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이 시기에도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 입증됐다.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은 여러 곳에서 출토됐다.

구운동에서는 반달형 돌칼과 무문토기 조각이 수습되었고, 금곡동에서는 무문토기 조각과 돌보습, 갈돌 등 농경․주거 생활과 관련된 유물이 수습됐다.

호매실동에서는 지석묘로 추정되는 유적과 무문토기 조각이 발견됐으며 고색동과 당수동에서도 무문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전 회에서 설명했듯 교동의 팔달산 남쪽 구릉사면에서는 총 4기의 고인돌과 간돌칼도 출토됐다.

또 화성시 태안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금산 일대에서도 다량의 무문토기 조각과 주거지 구덩이 등의 유구가 발견됐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까지 지속되고 있어 수원지역의 역사적 변화상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한다.

여기산에서는 1979~1981년에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청동기시대의 집터 4기와 철기시대의 집터 3기가 조사됐다. 집터 안에서는 무문토기 중기에 해당하는 공열문토기(토기 아가리에 구멍을 낸 구멍무늬토기)와 가락동식 토기, 석기로는 석촉과 숫돌 등이 출토됐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기원전 2,000년경~기원전 300년)를 대표하는 돌무덤으로 전 세계에 6만기의 고인돌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중 무려 2/3인 4만기가 한반도 지역에 분포한다. 가히 ‘고인돌 대국’이라고 할만하다.

수원박물관 공식블로그인 ‘수원박물관e야기’에 따르면 고인돌은 흔히 뚜껑 구실을 하는 넓은 덮개돌(개석:蓋石)을 여러 개의 굄돌(지석:支石)이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일종의 무덤방으로 꾸민 이 구조물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다고 한다.

고창군 고인돌유적지. (사진=김우영)
고창군 고인돌유적지. (사진=김우영)

고인돌의 분포관계를 보면, 주변지역인 중국과 일본의 일부 지역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들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4만 기 이상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과 내륙에 걸쳐 퍼져 있다.

어느 해 가을날, 지금은 고인이 된 등잔박물관 김동휘 관장님의 댁에서 차를 마셨다. 등잔박물관 자택의 한 쪽에 있는 넓적한 돌을 보다가 “고인돌처럼 생겼네요”라고 말하자 선생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고인돌을 발굴했는데 그 밑에서 마른 꽃이 나왔다고 했다. 오래 전 선사시대에도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이 죽으면 무덤 속에 꽃을 넣어 줬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지금이나 고대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선생의 말에 공감했다. 그날 밤 꿈에서는 슬퍼하면서 꽃을 망자의 시신위에 올리는 원시시대 사람들을 보았다.

앞의 글에서 한때 고인돌을 찾으러 수원시와 화성시 지역을 뒤지고 다녔다고 밝혔다. 인상적이었던 곳은 오산시 금암동 고인돌 밀집지역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금암동은 예부터 잘생긴 바위가 많아 '금바위 마을'로 불려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금'은 단군왕검의 '검', 임금의 '금' 등 신성시되는 글자다.

윤구병 선생의 견해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검’은 하늘의 다른 이름이었는데, 이것이 ‘감’으로도, ‘곰’으로도, ‘금’으로도, ‘김’으로도, ‘굼’으로 소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개마’. ‘고마’. ‘구마’, ‘구미’, ‘금와’, ‘기미’로도 가지를 쳤다고 했다. 우리나라 토박이 성씨 가운데 ‘김’ 역시 하늘을 가리키는 ‘검’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금암리는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곳이고 그 신성한 바위는 고인돌인 것이다. 고인돌이 있는 금암동엔 현재 고인돌공원이 조성돼 있다.

오산 금암동 고인돌. (사진=하주성)
오산 금암동 고인돌. (사진=하주성)

팔달산 고인돌은 발견된 4기 외에 더 있었을 수도 있다. 화성을 쌓으면서, 일제시기 신사를 만들면서, 운동장을 조성하고 경기도청을 짓느라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사라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는 고인돌은 없는지 대대적인 지표조사를 해보길 권한다.

고인돌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게 할 뿐 아니라 지역의 역사를 확장시키는 중요하고 위대한 민족의 유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