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날려 버리는 저 티끌
다 내가 만든 것들
나는 늘 배가 고파
아들을 낳고 안 먹어도 배불렀다는
어머니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안 먹어도 배부른 날 찾아
여기까지 왔네.
눈밭을 헤매는 짐승처럼 킁킁거릴 뿐
안 먹어도 배부른 까닭은 모르고
날마다 먹고 먹어도 배가 고파
하염없이 티끌이나 만들며
여기까지 왔네.
세상 티끌을 다 쓸어 버리는
바람의 고운 손은 누가 만드는지?
엉뚱한 꿈을 꾸면 더 어지러워
어머니 배고플 짓이나 해대며
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먹어도 먹은 줄 모르고
안 먹어도 먹은 줄 아는
어머니의 결빙하는 시간
그 언저리를 빙빙 돌면서
흐린 귀를 씻어주는 바람서리에
마침내 고픈 속을 조금 풀어보네
-「흐린 귀」/이상호
자신의 지난 인생행로를, 화자는 자신을 출산한 직후에 ‘어머니’가 지녔던 ‘안 먹어도 배불렀다’는 소감을 모티프로 삼아 일관 회고한다. ‘어머니’의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안 먹어도 배부른’ 자신을 ‘찾아/여기까지 왔네’라고 하고 있다. ‘늘 배가 고파’서.
우리는 그 관련 사정과 추이 주목을 일단 유보하고, 우선 화자 ‘어머니’의 그 소감에 함축된 뜻도 추정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표면 뜻은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잇게 한 안도 상태의 피력이지만, 가치 있는 보람된 일을 하여, 또는 한다면, 그 지독하고 끈질긴 먹는 욕구에도 구애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뜻을 상기해볼 수 있다.
8행부터 18행까지 화자는 자신의 그간 사정을 고백한다. 독자를 의식하는 자기비판의 독백에서 우리는 화자가 직면한 현실이 ‘눈밭’, 즉 먹을 그 무엇이 거의 없는 눈 덮인 황량한 겨울 들판과 같았으며, 그래서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게 그 ‘눈밭을 헤매는 짐승’이었다는 화자의 모습을 확인한다. ‘날마다 먹고 먹어도 배가 고파’서 ‘안 먹어도 배부른 까닭은’ 도저히 ‘모르고’.
어느새 우리의 대부분은 이 토로에 우리 자신의 사정을 결부시키고선 멋쩍게 공감할 것 같다. 우리의 삶도 늘 형편이 어려웠고 향유나 충족과는 늘 거리가 있었지 않았나, 스스로 동정도 하면서. 하지만 그 결미 ‘하염없이 티끌이나 만들며/여기까지 왔네’를 읽고서는, 충격과 더불어 공명을 그만 중지할 것 같다. ‘하염없이 티끌이나 만들’었다고? ‘눈밭을 헤매는 짐승’이었다고 해서 내 인생도 고작 그런 몰골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다가 우리는 16–18행, ‘어머니 배고플 짓이나 해대며/오다 보니/여기까지 왔네’를 읽고는, 화자가 우리와는 좀 다른 사정에다 다른 인격이라고 감지할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 배고플 짓이나 해대며’에서 보듯, 화자가 자신의 먹이 모색 행위를 ‘해댄다’고 비하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화자가 그런 비난을 자초하는 모종 저열한 ‘짓’들을 했다고 여기거나, 우리보다 도덕 수준이 높아 과도한 감상(感傷) 자책을 한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든 후자든 화자가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거리를 두면서, ‘티끌’ 운운을 추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단락의 첫 세 행(19-21행), ‘먹어도 먹은 줄 모르고/안 먹어도 먹은 줄 아는/어머니의 결빙하는 시간’도 우리의 시선을 정지하게 한다. 화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낳던 시간으로 돌아가 어머니가 그때 느꼈던 소감에 앞에 없던 의의를 짐짓 추가하여 우리의 안목도 짐짓 쇄신된다. ‘먹어도 먹은 줄 모르고’. ‘어머니’가 자신을 낳고 ‘먹어도 먹은 줄 모르’는 상태였기도 했다... 즉 당시 ‘어머니‘는 ‘안 먹어도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먹어도 먹은 줄 모르고’ 지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출산 보람과 그 희열, 화자는 ‘어머니’의 그 상태를 ‘결빙(結氷)’이라 은유한다. 결정(結晶)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언저리를 빙빙 돌면서’ 화자의 ‘흐린 귀’, ‘흐린 귀를 씻어주는 바람서리’는 13, 14행에서 등장했던 ‘세상 티끌을 다 쓸어 버리는/바람의 고운 손’을 ‘만드는’ 자일 것이다. ‘바람서리’로 현현한 이 고원(高遠)한 주체는 ‘누구’인가. ‘어머니’의 수정(水晶) 같은 그 소감과 상태와 유관한 위대한 모성(母性)의 존재일 것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우리는 현재의 화자가 그 주체에 힘입어 자신의 변화를 토로한 이 시의 결구, ‘마침내 고픈 속을 조금 풀어보네’를 연속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픈 속’은 앞에서 제시된 ‘하염없이 티끌이나 만들’던 ‘날마다 먹고 먹어도’ 고팠던 ‘배’인데, 여기서는 이전과 같이 유감과 힐난의 대상이 아니다. 세속 현실과 관련시켜 역시 ‘마침내’ 화자가 우리처럼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결핍. 화자는 ‘마침내’ 그 누구에게보다도 자신에게 선언한다. 그 ‘고픈 속’을 이제 먹지 않아도 ‘조금’ 자제할 수 있다고. 우리는 안다. 이 ‘조금’이 겸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코 말 그대로 적지 않다는 것을.
이 변모는 갑작스럽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5-7행에 복선(伏線)이 있었다. ‘어머니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안 먹어도 배부른 날 찾아/여기까지 왔네’에서 ‘곧이곧대로 듣고’이다. 하지만 이 때문만은 아니리. 어머니의 그 말씀을 또한 ‘마침내’ 실천할 수 있다는 의지와 자신(自信)이 또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화자에게 또 우리에게도 미묘하게 안도한다. 하지만 그래도 두려울 것 같다. 모든 어머니가 어찌 예상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열 달이나 회임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산고 끝에 출산한 생명이 아무리 먹고 살기 어렵거나 그 욕망에 집착된다고 해서 그저 ‘하염없이 티끌이나 만들며’ 사는 것을.
이 시를 다시 읽으며 7행 ‘여기까지 왔네’와 ‘여기까지 왔네’가 반복되는 12행, 18행에서 각각 잠시 휴지하면 감상에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