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잎바다
김 애 자
장맛비로 하늘과 땅 손 맞잡은 물속 달려
우중 연꽃 만나려는 단심으로 찾은 부여
애틋한 백제인의 넋 옛터에 피어난 듯
잎새 위로 잘게 튀는 빗방울들 모여들어
결 고운 은빛으로 한데 얼려 일렁이면
가거라, 문득 몸 기울여 물을 쏟는 연잎들
비우고 고개 드는 소리 없는 몸짓들이
자욱한 빗소리로 환각처럼 흔들릴 때
아득한 해조음처럼 천지 가득한 빗소리
한 생을 다 끝내고 스러져 눕는 꽃잎
그 품에서 아기처럼 고개 드는 연밥 보면
마음도 절로 열리는 비 오는 날 궁남지
수원시인협회 회원들과 부여로 문학기행을 다녀온 지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신동엽문학관을 찾는 일이야 굳이 철을 가릴 필요가 없겠지만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궁남지는 다르다. 아무래도 연못의 수면에 수련이 가득할 때가 제대로이다. 이제 막 꼼지락거리는 봉오리들만 보고 온 아쉬움이 크다.
김애자 시인의 시집 『환승할 역이 없다』를 다시 읽었다. 어느 해였던가 ‘장맛비로 하늘과 땅’이 ‘손 맞잡은’ 듯이 장대비 장하시게 나리시던 날이었다. 마음이 맞는 수원의 몇몇 시인이 어울려 ‘우중 연꽃 만나려’고 부여로 갔던 기록이 시집 속에 시조라는 정형의 틀로 오롯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되었다. 사진을 찾아 파일 정보를 들여다보니 2011년 7월이었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그날의 궁남지에는 ‘애틋한 백제인의 넋 옛터에 피어난 듯’ 연꽃이 만개해 있었다.
꽃들은 때를 가려 제철에만 핀다. 그런데 같은 계절이라도 시간에 따라, 그리고 날씨에 따라 꽃은 그 자태를 달리한다. 연꽃은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 보아야 더 아름답다는 깨달음을 얻은 게 그 여행길에서였다. 비단 꽃뿐만이 아니라 잎새도 그랬다. 완만한 기울기로 커다란 대접을 빚은 듯이 펼쳐진 ‘잎새 위로 잘게 튀는 빗방울들 모여들’었다. 물이 지닌 표면장력의 힘일까. 그냥 고이는 게 아니라 제 몸을 움츠려 커다란 방울을 이룬 그것들은 ‘결 고운 은빛으로 한데 얼려 일렁’이었다. 그러면서 채움과 비움의 거듭으로 살면서 지켜야 할 철리(哲理)를 가르쳤다. ‘가거라, 문득 몸 기울여 물을 쏟는 연잎들’이다. 채우기 전에 비우라는 가르침이다. ‘비우고 고개 드는 소리 없는 몸짓들’의 가르침을 빗속에서 한없이 바라보았다. 연잎은 하나의 계영배(戒盈杯)처럼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연(蓮)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일찍이 고산은 「어부사시사」에서 ‘연잎에 밥 싸두고’라고 했다. 연잎으로 밥을 싸서 쪄 특유의 맛에 매료되었던 것은 그 역사가 꽤 오래인 듯싶다. 연근이 귀한 반찬이라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고 흔히 연밥이라고도 부르는 연실(蓮實)은 소중한 약재로 쓰인다. 시인은 ‘한 생을 다 끝내고 스러져 눕는 꽃잎/그 품에서 아기처럼 고개 드는 연밥 보면/마음도 절로 열리는 비 오는 날 궁남지’라며 「연잎바다」에서 우중 개심(開心)의 경지로 시를 마무리한다. 비우는 게 채우는 것이다. 사족을 단다. 이번 문학기행에 김애자 시인이 여러 번거로운 다른 일로 함께 하지 못해 너무 아쉽다.
선생님. 허언이 아닙니다. 연꽃이 만개할 즈음, 하다못해 가까운 관곡지라도 마음을 함께 하는 몇몇 사람이 모여서 다녀오도록 하시죠.
김 애 자 시인
1989년 《시대문학》(수필), 2001년 《예술세계》(시)
2017년 《시조시학》(시조)으로 등단
시집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환승할 역이 없다』
수필집 『그 푸르던 밤안개』, 『추억의 힘』 등 다수
제물포문학 본상, 수원문학상 작품상, 경기문학인상 수상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