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27)] ‘그렇게 다시 만나 한 몸이 될 거야’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우리는 한 몸이었지

같은 물 먹고 바람을 먹고

함께 구름을 보고 새소리를 들었지

예전에 우리가 참나무였을 때,

도막도막 잘려서 지게에 얹히기 전까지

우리는 한 몸이었지

모진 도끼날을 맞으면서 쪼개지지 않으려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지

 

이제는 가리가리 찢긴 몸으로

오리나무와 소나무와 아카시아 장작들과

함께 누워 하늘을 보지

네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닿지가 않네

그렇지만 너도 저 바람 소리를 듣고

비가 오면 함께 몸이 젖는

아직도 우리는 한 몸

 

언젠가는 우리 다시 아궁이에서

같은 불꽃으로 활활 뜨겁게 타오를 거야

무쇠솥을 벌겋게 달굴 수 있을 거야

차디찬 물을 펄펄 끓게 할 거야

재가 되고 흙이 되어서

아기 참나무를 다독다독 키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다시 만나 한 몸이 될 거야 

      - 「오랜 옛사랑에게」/권선옥

 

 우리는 이 시를 읽고 새로운 메시지를 인각(認覺)한다고 자각하기 어려울 듯하다. 과거에 ‘한 몸’이었고, 현재 ‘가리가리 찢긴’ 상태이나, 미래에는 ‘다시 만나 한 몸이 될 거’라는 결미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면서. 그렇게 이 시의 구조를 낙관 도식으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쉽게 시선을 돌리지는 못할 것 같다. 1, 2연의 개성 있는 구체 면모가 우리의 심금에 호소하는 바가 있고, 그 여운이 소진되지 않고 있으며, 3연의 중첩되는 희망과 전망이 단정이 아니면서, 처절한 고통과 비애를 못내 자위(自慰)하려는 하소연으로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정리를 시도하려면 일단 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하나의 추정을 유력하게 상정하여야 한다. 1연에서 제시된 ‘도막도막 잘려서 지게에 얹히기 전까지’ ‘한 몸이었’던 ‘참나무’인 작중 ‘우리’를 그렇게 ‘쪼개’버린 ‘모진 도끼날’이,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부당 불의한 폭력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이기 욕망에서 배태된 탐진치(貪嗔癡)이기도 했을 수 있다고. 아무리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비참한 결렬에는 외침만 있지 않고 모종 내분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 우리는 우리의 세속 삶과 세계의 분쟁을 돌이키며 이 의심을 깨끗하게 지우기가 어려울 수 있다. 또 전자뿐이라면 외부의 그 폭력을 지탄하고 부정하는 진술이 2연에서 격렬하게 이어져야 할 텐데, 보시다시피 그렇지 않기도. 앞에서 이 추정을 일단 유력하게 상정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제기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또 아무리 ‘가리가리 찢긴’ ‘장작’이 되어 ‘함께 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 신세라고 하더라도, ‘네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그래도 손이 ‘닿지가 않’는다는 말인가? 우리의 추정은 점점 짙어질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덧 우리는 우리에게도 의아해진다. 1연과 2연의 가혹한 운명을 회피하려 하지만 우리의 세속 삶과 이 세계의 도처에서 흔하고, 2연의 ‘바람소리’와 ‘비’를 함께하는 애틋한 연대의 정서가 오히려 드물지 않느냐는 고정관념 비슷한 인식을 하는 자신을 문득 자각하고서. 이 시는 쓰인 그대로 읽히기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언외의 사정을 상기시키며 일탈 감상을 시도하게 하는 문제작일 수 있다. 

 우리는 3연 1, 2행, ‘언젠가는 우리 다시 아궁이에서/같은 불꽃으로 활활 뜨겁게 타오를 거야’를 읽으며 의외의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는 다시 아궁이에서’라고? 이 여건을 주목하면, 3연은 2연의 단순한 후속이 아니며, 두 가지 강력한 시사가 있다. 첫째, 2연 상황, 즉 ‘찢긴’ ‘우리’가 무슨 화형 대상으로 불태워지거나 불의한 화형 집행에 사용될 장작더미의 일부로 역시 같이 불태워지는 운명은 반복된다, 둘째, 3연은 그러다가 혹간 있기도 하는 별개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무쇠솥을 벌겋게 달굴’ ‘같은 불꽃으로 활활 뜨겁게 타’올라 ‘차디찬 물을 펄펄 끓’이고, 또 ‘재가 되고 흙이 되어서/아기 참나무를 다독다독 키울 수 있’는 일을, 그리하여 ‘그렇게 다시 만나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을 어찌 자주 쉽게 이룰 수 있겠는가. 

 이 시를 읽고 나면, ‘쪼개’진 ‘참나무’ 화자의 가열 찬 진술은 그대로 마무리되지 않고, 서서히, 분열된 우리의 모종 처지를 형상화한 알레고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오늘은 21대 대선 투표 날. 2024년 봄에 발표되었고, 올해 3월 1일에 다시 발표된 이 시를, 근간 시국과 투표와 투표 이후에 관련시켜 읽었다. 특히 3연의 희망과 전망을 화자와 우리를 동정하며 우리가 품고 당장 이루자고 한다면 너무 이른 것인가. 오활(迂闊)하기만 한 것인가.   

 어쨌든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재가 되고 흙이 되어서’, ‘그렇게 다시 만나’ 우리의 ‘아기 참나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계속되는 미련에 3연을 다시 읽어보니, 그 희망과 전망에는 그 구현에 관련된 의지와 예정의 기정 기미 또한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