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28)] 석주 이상룡 선생 93주기 추모식
지난 6월 7일(토) 오전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 1858-1932) 선생 서거 93주기 추모식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선생의 묘소에서 열렸다. 선생이 1925년 9월 24일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면서 발표한 100년 전 「취임사」[《독립신문》, 1925년 9월 25일자 호외]가 식순의 하나로 낭독되어, 어느덧 옷깃을 여미고 경청하였다. ‘합심동력(合心同力)’을 강조하기도 하여 오늘의 시국에서도 적극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에 일반 국민의 앞에서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의 공(供)에 취(就)하나이다. 임(任)에 당(當)하야 상(常)히 헌법을 준수하며 민의에 근거하야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국가의 완전한 독립을 조속히 성취하야 인민의 자유 회복하려하나이다.
우리 민족이 국가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를 위하야 분투(奮鬪)하여 오는 것은 멀리 갑신(甲申) 갑오(甲午) 이래의 계속적 운동이라. 그러나 혹은 외력만 의존하였고, 혹은 조직이 완전치 못하였음으로 다 실패에 귀(歸)하였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 대의를 집고 일어나는 의병의 기치와 지사의 열혈이 운동을 계속하여 오다가 전민족의 각오 하에서 갱생의 신기원이 3.1운동으로 나타나서 민국의 임시정부가 건설된 바, 과거 7개년에 촌토척지(寸土尺地)를 광복지 못하였으니, 이에 대하야 뉘가 통탄치 아니하리오.
그러나 한번 돌이켜 생각건대, 과거는 대개 선전의 시기에 속하였음으로 전민중의 조직적 단합을 이루지 못하야 운동의 효과가 지연(遲延)한지라. 이제 경장쇄신(更張刷新) 초에 제(際)하야 국민 전체가 온전히 대동단결의 조직선(組織線)에서 함께 분투하여야 하겠으며, 이를 신속히 성취하려면 먼저 가장 진정으로 희생적 계속적으로 분투하여오든 용감한 전사(戰士)들이 속히 최고기관 하에서 완미한 결합으로 운동의 기초를 공고케 하여 역량을 강대케 하여야 될 줄 깊이 믿고 이에 힘쓰려 하나이다.
평소에 재주가 없고 아는 것이 적은데 더욱이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되어, 두려운 생각이 밤낮 놓이지 아니 하옵는 바, 오직 모든 일은 중심(衆心)과 중력(衆力)을 합하는 곳에서 이루는 것이니, 상(常)히 합심동력(合心同力)하여 대업을 속히 성취케 함을 바라나이다.
대한민국 7년 9월 24일 국무령 이상룡
1925년 당시 상황이 문맥과 행간에 반영되어 있는 가운데, ‘헌법을 준수’ ‘민의에 근거’ ‘의무를 이행’ 등, 오늘날 대통령 취임 선서의 명분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목되었다. 또 간절히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 ‘국가의 완전한 독립’ ‘인민의 자유 회복’은 당시 우리 선열들과 민중의 비원(悲願)과 통탄을 대변한 지표로, 세찬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 관련된 선생의 역사의식도 그러하였다. ‘우리 민족이 국가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를 위하야 분투(奮鬪)하여 오는 것은 멀리 갑신(甲申) 갑오(甲午) 이래의 계속적 운동이라’한 바, 대한민국과 임정으로 전개되는 지난 운동들의 초두에, 1884년 김옥균 서재필 등의 ‘갑신(甲申)’정변을 제시한 것이다. 문맥에 따르면, 갑신정변은 비록 ‘외력’[일본의 지원]에 ‘의존’했다가 ‘실패’하였지만, 청국 사대 폐지,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등 80여 개혁안이 당시뿐만 아니라 근대화 혁신에 여전히 필요한 강령들이란 인정이 약여하다. 갑오개혁도 마찬가지. 오늘의 관점에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 있지만 조선 왕조가 반란이거나 그 유사 형태로 규정하고 끈질기게 폄훼했던 기성관념에서 벗어났으며, 그 이후 일제가 우리를 병탄한 원수였고 1925년 당시에 더욱 그러하였는데도 과감하게 흑백논리에 구애받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일어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여러 항일‧반일운동이 ‘조직이 완전치 못하’여 ‘실패’했다고 하였다. 선생의 이 성찰에는 자신의 지난 미흡과 한계도 포함되어 있고, 그 대책으로 임정을 부각하고 있어, 선생의 개인사에서도 뜻깊은 대목이다.
선생이 자신의 우국충정을 혁신한 시기는 대략 1907년 류인식 김대락 김병식 김후병 김동삼 등과 호계서원의 자산을 활용하여 협동학교를 설립하던 무렵이며, 특히 1908년 2월에 거금을 들여 가야산을 근거지로 거창에서 차성충 등과 의병 거병을 시도하다가 2년 노력이 실패하면서 확실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선생은 양계초의 저서 등을 읽고 메모하며 자신을 적극 개신하였다. 1911년에 오랜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족을 동반한 만주 망명도 그 일환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시대의 여건을 헤아린 민족지성의 능동 처사였지만, 그러나 선생이 그 이전 청년시절에 함양했던 성리 유학의 가치가 그 기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18세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 1827-1899)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였으며, 여러 문목의 질의를 하였던 선생은, 27세이던 1891년에 서산 선생이 주도한 호계서원의 강학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권오영, 「19세기 안동 유림의 학맥과 사상」(『대동문화연구』 제36권, 성대 동아시아학술원, 2000)] 그해 5월에 검토된 해설과 토론의 텍스트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태극(太極)에 연관된 인간의 본성으로 제시하고, 심합이기(心合理氣) 심통성정(心統性情)을 매개로 그 실천을 모색하는 50대 주자의 원숙한 「옥산강의(玉山講義)」였다. 1891년과 1893년 사이에 선생이 지은 다음 시에 그 관련 편린이 보인다.
天下物有萬 천하에는 만물이 있거늘
吾生幸爲人 나는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났네
方寸具五性 마음이 오성을 갖추고 있어
初不異聖人 애초에는 성인과 다르지 않았거늘
如何不踐形 어째서 천성을 실천하지 아니하여
終作下等人 끝내 하등 부류가 되었는가
靜思咎在我 생각건대 허물이 내게 있으니
不敢尤他人 감히 타인을 탓할 것은 아니네
聖謨布方策 성인의 법도가 서책에 실려 있고
喫緊爲後人 후인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네
毋以爲高遠 고원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리
人道在當人 사람의 도리는 그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但竭吾誠力 다만 나의 정성과 힘을 다하여
百千之於人 남보다 백번 천번 더 노력을 할 뿐
從玆抵老死 지금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지속한다면
尙可做善人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테지
墨卿爾聞之 묵경[먹]이여, 너는 들을지어다
我非食言人 나는 식언하는 사람이 아니니라
- 「인자음(人字吟)」[『국역 석주유고』 상권,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경인문화사, 2008, 36쪽)
3행의 ‘오성(五性)’은 인의예지와 신(信)이며, 다 같이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품부된 이 선성(善性)을 인간은 그 본연의 이치에 따라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과 자기격려가 전체에 걸쳐 선명하다. 5, 6행, ‘실천하지 아니하여’ 현재 ‘하등 부류가 되었’다는 염치의 자기경고에서 선생의 파탈한 그릇과 대범한 각오를 볼 수 있으며, 11행, 일상의 실천 법도를 ‘고원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리’에서 도덕 지향의 호연지기 패기를 느낄 수 있다. 끝 행 ‘나는 식언하는 사람이 아니니라’는 장담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이후 선생의 행적으로 입증된다.
이러한 인간 충실을 지향하는 각오와 패기는 선생 개인 차원은 물론, 심화되는 국난 시기 국가 사회 차원으로의 확대에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1895년 이후 의병 활동은 물론, 1907년경의 그 괄목할 변화도, 1910년 만주 망명 결단도, 그 이후 1932년 서거할 때까지 선생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감내한 여러 공선사후(公先私後) 풍찬노숙(風餐露宿)에는 그런 내면의 기초가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선생을 기리려고 다음 글을 읽고자 한다.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던 망명 당시 66세 손위 처남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 1845-1914)이 분사하자, 1주기에 쓴 「제백하처사김공문(祭白下處士金公文)」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천하의 일이란 반드시 스스로 만드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혹은 가는 자가 터를 닦아놓으면 오는 자가 집을 짓기도 하고, 혹은 앞사람이 누대를 지으면 나중 사람이 차지하기도 합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바로 공의 뜻을 이을 마음을 지닌 자들입니다.
- 『국역 석주유고』 상권, 659쪽
우리는 백하 선생의 혼령을 위무하는 선생의 이 문장을 음미하다가 어느덧 우리가 선생의 혼령을 위무하는 말로, 나아가 모든 독립운동가들께 헌정하는 송사(頌辭)로 여기는 자신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선생을 포함하여 오늘 대한민국의 ‘터를 닦’고, 각종 ‘누대를 지’은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후예일 수밖에 없다. 또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서라도 그분들의 노고와 공훈을 기억하고 예우하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우리 본성의 양심이 지시하는 역사의 정의. 나아가 지난 정부들이 검토하다가 그만 둔, 독립유공 3급 서훈에 그친 1962년 이래 선생의 훈격과 선생과 같은 처지에 있는 여러 선열들의 훈격을 아울러 제대로 상향 조정하기를 새 정부에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