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29)] ‘조금만 더 난간을 붙잡고 견뎌 봐 흔들려 봐’
무한의 바다로 널 데려다줄게
때로는 조류에 휩쓸리고 롤링이 있을지라도
난간을 붙잡고 버텨 봐
베란다는 배란다
베란다가 없는 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바다가 없다 등대가 없다 등대지기가 없다
베란다에서 배란다까지 거리는 얼마일까
때로 베란다 난간에서 디카프리오처럼 두 팔을 벌려 보지만 앞에는 허공뿐
나는 날아가는 배란다
베란다에서 깜빡이는 등대까지의 거리는 얼마일까
그래서 다시 배란다
때론 뱃멀미로 헛구역질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명한 낚싯대 주차장으로 드리우면 묵직한 손 떨림 대어가 낚인 건가
그래 배란다에서
화분 몇 개 꽃 피기를 기다리며 꽃나무에서 베란다까지 다시 훼리호 뜨는 부두까지 거리는 얼마일까
기적 소리를 울리며 떠나는 배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난간을 붙잡고 견뎌 봐 흔들려 봐
- 「베란다는 배란다」/변종태
화자가 1연에서 일약 부각한 제안, ‘무한의 바다로 널 데려다줄게/때로는 조류에 휩쓸리고 롤링이 있을지라도/난간을 붙잡고 버텨 봐’에 우리는 호의의 반응을 내놓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1행은 좀 매력 있다고 할 수 있었으나 2, 3행은 우리가 가끔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는 인내의 극복 메시지와 다르지 않아 별 감응을 자각할 수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시도 인간의 삶처럼 끝이 나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 관심이 좀 줄었지만 우리는 계속 읽었을 것이다. 첫 인상과 다른 시들을 어디 한두 편 읽었나. 선입견과 예상을 어색하게 하다가 급기야 파괴하고 만 좋은 시들이 있었다. 반대 경우도 있었고.
과연 우리는 끝 연 ‘기적 소리를 울리며 떠나는 배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지만/조금만 더 난간을 붙잡고 견뎌 봐 흔들려 봐’에서, 재인식의 발단을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1연을 강조하기 위해 마무리하는 그 반복으로 보았지만, 곧 ‘배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지만’을 주목하며, 끝 연 전체의 취지를 다시 새기게 되었다. 즉 인생 항해에서 ‘조류’와 ‘롤링’ 같은 난경(難境)들이 없을 수 없고 그때마다 불발(不拔)의 극복 노력을 견지해야 하지만, 그 결과를 아무래도 낙관할 수 없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재인식은 이 취지에서가 당연히 아니다. 문제는 그런 필사의 노력을 경주할지라도 도달 여부가 불투명한 목적지가 바로 그 ‘무한의 바다’라는 사실. 우리는 그제야 그 바다가 어떤 바다인지 잘 알 수 없고, 또 우리가 보통 바라고 바라는 성취의 시공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듯 깨닫는다. 게다가 그 바다는 선경(仙境) 같은 이상향도 아니다.
다시 말해 ‘조금만 더 난간을 붙잡고 견뎌 봐 흔들려 봐’란 간절하고 안타까운 조건에 해당하는 격려의 제안을 기진맥진 극한의 상태에서 실천해보아도 그나마 도착을 기필할 수 없는 그곳. 그런데 의외에도, 우리는 이 시의 이 메시지에 애초와 다른 이유에서 부응하기를 꺼려하며 뒷걸음치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해 가까이 가보려 하지 않나. 그러다가 우리는 2연 1행, ‘베란다는 배란다’, 3연 2행, ‘나는 날아가는 배란다’를 다시 읽고, 이 두 은유에서 재인식의 두 번째 단서를 확보한다. 전자에서는, 화자가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자신의 상념을 진술하면서 ‘베란다’를 ‘배[선(船)]’의 선미나 선두로 비유하고 있고, 나아가 후자에서는 ‘베란다’에 있는 자신을 ‘허공’을 ‘날아가는 배란다’라고, ‘배’로 확대 비유하고 있는데, 이 진술이 자신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발하는 독백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직후 ‘베란다에서 깜빡이는 등대까지의 거리는 얼마일까’라는 자문(自問)과 이어지는 ‘그래서 다시 배란다’란, 현실의 ‘베란다’와 관념의 ‘등대’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가늠에 관련된 ‘배’로서의 자의식 진술은 그런 추정을 촉진한다.
그 다음 시행 ‘때론 뱃멀미로 헛구역질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명한 낚싯대 주차장으로 드리우면 묵직한 손 떨림 대어가 낚인 건가’에서, ‘뱃멀미’와 ‘헛구역질’은 일상의 고초나 무미를 표상하는 환유이고, 그것들이 야기되는 ‘베란다’는 진술의 현재 공간을 지시하는 환유, 그 이하의 ‘대어’는 ‘무한의 바다’와 대조되는 현재 화자가 구애되며 스스로 구차하게 여기는 일상 욕망의 환유일 것이다.
다시 ‘무한의 바다’를 지향하는 4연에서 우리의 감상에서 작지만 문제시되는 그 1, 2, 3행, ‘그래 배란다에서/화분 몇 개 꽃 피기를 기다리며 꽃나무에서 베란다까지/다시 훼리호 뜨는 부두까지 거리는 얼마일까’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면 어떨까 한다. ‘무한의 바다’로 가려는 배 같은 내가 그 꿈을 이루는 진전을 하려면 몇몇 화분에 심은 꽃나무가 꽃을 피우듯 그 꿈의 몇몇 측면에서 성숙을 이뤄야 하고, 또 ‘베란다’, 즉 현실의 여건까지, 나아가 ‘훼리호’ 같을 내가 뜰 장소, 그 ‘부두까지’, ‘거리’가 또 얼마가 되는지 현재 헤아려보고 있다, 라고.
늦었지만 이 시의 화자를 위하여 변명 하나 첨가를 잊지 말아야겠다. 2연 2, 3행, ‘베란다가 없는 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바다가 없다 등대가 없다 등대지기가 없다/베란다에서 배란다까지 거리는 얼마일까’도 말뜻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석(註釋). 화자의 의도는, 지금 여기 일상의 시공에만 갇혀 있으면 저 일망무제의 시공 ‘무한의 바다’를 꿈꿀 수 없고 안내판도 있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현실과 지향 사이의 거리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취지. 이 역시 우리가 앞에서 진단해본 대로 화자가 자신에게 당부하는 진술에 가깝다.
이상을 종합하면 우리는 드디어 상징에 가까운 ‘무한의 바다’를 서서히 경외 경원하면서 우리 자신의 현재를 돌이켜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자의식의 어떤 과소도 과장도 없이. 한편 우리가 상게 시를 더 이해하려 한다면 최근 발간된 시집 『일간 어머니 정기구독』(파란)에 같이 실린 「삶을 읽다」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을 읽네 죽어라 죽어라고 생명은 왜 그리 질긴 건지 인연은 또 왜 그리 단단한 건지 부러지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초록이 오늘 밤도 광합성을 하네 뿌리를 내리네 저 푸르게 목숨이 붙은 것들을 어찌할 거나 미친 거 아니냐고 물어도 히부죽이 웃기만 하는 초록들 어찌할 거나 저 목숨들을 베란다에서 불면을 훔쳐보는 저 푸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