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60)] 이정순 '폭우'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폭    우

                        이  정  순

 

일기예보는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우산이 눈앞에서 빙그르르 춤을 춘다

난 갑자기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객(客)이 되었다

어느 집 처마 끝이 이리도 황량할까

뻥 구멍 난 하늘이 무심하다

코앞에 손가락만 한 빗줄기 좍좍

어느 피아니스트의 숨결

거침없이 건반을 두드린다

꽃잎에

돌멩이에

웅덩이에

포르테의 강렬함이 새롭다

빗줄기가 전주곡을 타고 있다.

 

한여름이면 흔히 겪는 일이다. 무슨 숨 가쁘게 긴급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심지어는 가지고 나가겠다고 현관 어귀에 세워놓고도 막상 잊고 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산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비를 만나게 된다. 시인도 그랬나 보다.

‘일기예보는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비를 만났다. 그것도 하필이면 폭우다. 갑자기 두고 나온 ‘우산이 눈앞에서 빙그르르 춤을’ 추듯 맴을 돈다. 졸지에 남의 집 처마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객(客)이 되’고 말았다.

위의 시는 이정순 시인의 시 「폭우」의 전문이다. 시의 전반부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여름날 일상에서 겪는 경험이다. 이 시를 읽고 새삼 비 내리는 여름 한나절만이 지닐 수 있는 서정을 만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코앞에 손가락만 한 빗줄기 좍좍/어느 피아니스트의 숨결/거침없이 건반을 두드린다/꽃잎에/돌멩이에/웅덩이에/포르테의 강렬함이 새롭다’

내리는 빗줄기가 갑자기 피아니스트의 숨결이 되고 꽃잎과 돌멩이 그리고 웅덩이까지 모든 지상의 존재는 건반이 되어 포르테의 강렬함으로 두드린다. 시인도 ‘빗줄기가 전주곡을 타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쇼팽의 전주곡들을 듣고 싶은 저녁이다. 특히 일명 빗방울 전주곡이라고도 불리는 15번이. 쇼팽이 비에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는 연이 조르즈 상즈를 기다리며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렸다는 곡. 아 나는 오늘 밤 또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이 정 순 시인

2006년 《문학시대》로 등단

시집 아버지의 휠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