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운강석굴을 다시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 설렌다

김우영 논설실장 / 시인
운강석굴 입구. 언덕 위에 있는 것은 명나라 때 쌓은 토성이다. (사진=2002년 김우영)
운강석굴 입구. 언덕 위에 있는 것은 명나라 때 쌓은 토성이다. (사진=2002년 김우영)

전생에 어떤 선업을 지었는지 중국의 3대 석굴을 모두 보았다. 대동 운강석굴과 낙양 용문석굴, 돈황 막고굴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곳은 대동의 운강석굴이다. 물론 낙양 용문석굴과 돈황 막고굴도 어마어마한 규모와 예술·종교적 가치가 있지만 운강석굴이 가장 인상적인 까닭은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대규모 석굴이기 때문이다.

운강석굴은 2002년 (사)화성연구회 여름답사 때 만났다. 대동고성과 화엄사, 현공사, 쌍림사와 진국사, 평요고성을 답사하는 여행이었다.

그때 내가 쓴 답사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운강석굴이여! 내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 이 몸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그대들을 보러 올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신에게 한 이 약속을 지키게 됐다.

올해 화성연구회 여름답사(8월 5일부터 9일까지) 코스에 운강석굴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약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동의 운강석굴 석불. (사진=2002년 김우영)
약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동의 운강석굴 석불. (사진=2002년 김우영)

2002년 8월 4일, 대동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 때마침 내린 비로 시뻘건 황톳물이 흘러내리는 하천을 따라 가다가 운강석굴을 만났다.

멀리서 봤을 때는 흡사 벌집처럼, 혹은 토굴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놀라움과 감동은 커졌다.

남쪽을 향한 석벽에는 모조리 굴이 파져 있고 그 굴속엔 현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색채로 칠해진 5만1000여 존의 부처와 보살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부처와 보살뿐 아니라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과 비슈누신까지도 함께 모셔져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란! 그 규모의 웅장함이란! 그 정교함이란! 그 빛나는 색채의 조화란! 그 믿음의 장엄함이란!

정지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운강석굴은 중국의 3대 석굴 중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석굴은 모두 53개가 발견됐다.

이 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쯤이다.

460년 당시 북위(北魏) 승려들의 우두머리인 사문통 담요(曇曜)의 지휘 아래 굴삭이 시작되어 494년 대동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공사가 진행됐다.

원래 운강석굴 암벽에는 10만여 점의 조각 작품이 있었으나 지금은 5만1000여점 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에는 세월과 기후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손길 탓이 더 컸을 것 같다. 특히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은 이 운강석굴을 구시대의 유산이라고 해서 모두 없애버리려고 했었다는 애기를 들으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운강석굴의 제16굴에서 20굴까지의 유명한 담요5굴은 북위가 대동에 천도한 지 62년 후인 460년에 담요의 직접 지휘로 조성됐다. 운강석굴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20굴의 거대한 좌상은 가장 유명해서 운강석굴을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20굴의 거대한 좌상은 운강석굴을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사진=2002년 김우영)
20굴의 거대한 좌상은 운강석굴을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사진=2002년 김우영)

20굴에는 이런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석굴을 파서 부처좌상을 완성한 다음날 갑자기 석굴이 무너져 내렸다. 신기하게도 석굴 입구만 무너지고 부처좌상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오색찬란하면서 밝은 빛이 부처좌상의 머리 위에서 하늘로 부챗살처럼 퍼져 올랐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이는 이 걸작을 만든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경의(敬意)이다. 아니, 경외(敬畏)이다.

운강 노천대불로 불리는 20굴은 걸작중의 걸작이다. 얼굴 가득 자상하면서 여유 있는 웃음을 그윽하게 머금고 있으며, 전체 형상은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있다.

제11·12·13굴은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제11굴 동쪽 벽의 위쪽에는 '북위 태화(北魏太和) 7년(483년)이라고 쓰여 있다.

제12굴 입구의 기둥과 13굴의 남쪽 벽은 매우 아름답다. 12굴은 ‘음악굴’이라고 불리는데 비파나 하프, 가로피리와 함께 페르시아에서 전래돼 온 서역 악기와 장고, 북 등이 새겨져 있다.

흡사 모든 악기들의 화음이 들리는 듯하다.

제7·8·9·10굴은 각각 두 굴이 한 조를 이루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제8굴 입구 동·서쪽 벽에 새겨져 있는 인도의 시바신과 비슈누신이다. 이 힌두교의 신들이 왜 중국 고대 불교 유적지에 새겨져 있을까?

운강석굴 입구에 들어서면서 다층 목조 건축물로 치장돼 있는 것은 제5·6굴이다.

두 개의 석굴을 덮고 있는 4층의 이 목조 건물은 청나라 때 다시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제5굴에는 운강석굴에서 가장 큰 17m의 좌상이 중앙에 놓여 있으며 수많은 불상이 중앙을 바라보는 형태로 조각돼 있다. 제6굴은 중앙에 높이가 15m인 방형의 탑기둥이 서있고 후실의 동남서쪽 벽에는 석가모니가 태어나 성불할 때까지의 과정이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이번 여름답사 일정에는 2002년에 갔던 평요고성과 현공사도 포함돼 있어 가슴이 설렌다. 평요고성도 다시 한 번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다.

평요고성 답사기는 나중에 기회를 보아 올려볼까 한다.

*필름인화 사진을 또다시 촬영하다보니 사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