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62)] 박설희 '곰배령'
곰배령
박 설 희
곰배령 부동산엔 드나드는 고객들이 철 따라 바뀐다
단기 임대가 대부분이지만 장기 임대도 있다
중개 수수료는 따로 없다
봄에는 복수초, 노루귀, 모데미풀, 엘레지, 홀아비바람꽃
여름에는 동자꽃, 노루오줌, 물봉선, 진범, 산꼬리풀
가을에는 까실쑥부쟁이, 투구꽃
햇빛과 바람과 비는 관리비 없이 골고루 나눠 쓰고
세입자가 또 세를 놓는 경우도 많아서
벌이나 나비, 개미나 여치 등이 그들이다
고라니와 토끼들이 입맛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농사를 짓는 것은 멧돼지 농부
하룻밤에 언덕 하나 밭갈이는 거뜬하다
경계를 짓는 철조망이 없어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이 눈치껏 자유롭게 드나든다
공유 경제를 배우겠다고 사람들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종종 안개나 비구름에 밀려
고작 사진 몇 장 찍고 서둘러 물러간다
일가를 아무리 많이 거느려도
스스로 비워줘야 할 때를 안다
다만, 가장 아름답게 피었다 지는 것이 임대조건
오늘 곰배령 부동산에 금강초롱꽃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신부 화장 끝낸 화사한 모습으로
위의 시는 지난 5월 박설희 시인이 새로 펴낸 시집 『우리 집에 놀러 와』에 담긴 시, 「곰배령」의 전문이다. 곰배령이 어디이던가. 대한민국에서 병역의무를 그것도 육군으로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 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가겠다.’가 그것이다. 강원도의 인제와 원통. 오지 중에서도 오지이다. 요즘은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리고 차편도 좋아져 그나마 덜하지만, 예전에는 휴가를 받아 나올라치면 나오는 데에만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 강원도 인제에 곰배령이 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여 자연 생태계의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어 희귀식물도 많은 곳으로 알고 있다. 시인은 그 곰배령에 세입자가 되고 싶어 눈여겨보았나 보다. 아무렴. 부동산 활동에 가장 기본은 임장활동이니.
그런데 그곳의 ‘고객들이 철 따라 바뀐다’는 것이다. ‘단기 임대가 대부분이지만 장기 임대도 있다’고 한다. 다년생 풀도 있고 토박이 터줏대감 같은 교목과 관목도 우거졌지만 한 계절 피어 족히 흔들리다가 지어 이다음 해를 기다린다. ‘봄에는 복수초, 노루귀, 모데미풀, 엘레지, 홀아비바람꽃/여름에는 동자꽃, 노루오줌, 물봉선, 진범, 산꼬리풀/가을에는 까실쑥부쟁이, 투구꽃’ 등 풀과 꽃들이 단기 임대하는 터가 곰배령이다.
‘햇빛과 바람과 비는 관리비 없이 골고루 나눠 쓰고/세입자가 또 세를 놓는 경우도 많아서//벌이나 나비, 개미나 여치 등이 그들이다/고라니와 토끼들이 입맛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대자연이 베푸는 은총 속에서 그 꽃들은 벌과 나비 그리고 개미나 여치 등에게 베풀고 기꺼이 고라니와 토끼의 먹이가 되어 주기도 한다. 뿐만이 아니다. 멧돼지나 너구리 그리고 오소리나 삵같이 사나운 짐승들도 굳이 경계를 짓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다.
다만 사람에게는 그 속살까지 보이는 일은 삼간다. 그렇기에 ‘종종 안개나 비구름에 밀려/고작 사진 몇 장 찍고 서둘러 물러’갈 뿐이다. 인간의 허튼 욕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가를 아무리 많이 거느려’ 드넓은 구릉에 흐드러져도 ‘스스로 비워줘야 할 때를 아’는 오로지 ‘가장 아름답게 피었다 지는 것’만이 임대조건인 자연의 터전. 그 곰배령 부동산에 ‘금강초롱꽃이’ ‘신부 화장 끝낸 화사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다’
좋다. 그냥 좋다. 좋은 시는 읽고 또 읽어도 좋다. 빗댐 속에 숨은 생략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기상 이변이 심상치 않다고들 한다. 모두 인간의 탐욕과 안락을 위해 저지른 만행의 부메랑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오늘도 또 그 꽃과 풀 그리고 나무와 숱한 생명들의 터전을 침범할 궁리만 한다. 위의 시는 읽는 이에게 그 자성의 단초를 제시한다. 물론 그 속에 나도 포함된다. 열대야이다. 어제는 불면에 시달렸는데 오늘 밤은 곰배령 숲속을 그려보는 일로만도 그 더위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참, 박설희 시인. 지난 5월 신록을 가득 담아 보내신 시집을 받고도 잘 받았다는 답신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호구(糊口)에 매달려 틈이 없었다는 말은 핑계고, 아무래도 천성이 게으른 탓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이 글로 시집 잘 받았다는 인사를 대신합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시기를.
박설희 시인
2003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슴을 재다』
산문집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