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너무 일찍 떠난 사람, 막사발 김용문 작가
3일 낮 점심시간에 안타까운 부음(訃音)을 들었다. 세계적인 막사발 작가 김용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김용문 작가는 지난해 6월까지 수원일보에 ‘김용문 막사발 실크로드’를 연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중단한 바 있다.
김용문은 나보다 두 살 위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지금은 문을 닫은 화성시 서신 쟁이골에서 밤새 꼿꼿하게 앉아 술을 마시며 기 싸움을 벌였다. 대부분 사내들이 그렇듯이 그런 통과의식을 거친 후 친해졌다.
오산에서, 수원에서, 서울 인사동에서 수시로 만나 술을 마셨다. 그는 막사발 몇 개 팔렸다고 좋아하며 앞장서서 술집으로 향했다.
김용문은 1982년 ‘토우전’을 시작으로 30차례 가까운 개인전을 열었다. 세계막사발장작가마 페스티벌을 창설해 수원과 오산 등 국내와 중국, 일본,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 해외에서 매년 열고 있다.
김용문이 천착하는 막사발은 우리 선조들이 밥그릇, 국그릇, 막걸리 사발 등 생활그릇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찻잔으로 각광받았으며, 조선도공이 만든 막사발은 보물(이도다완:井戶茶碗)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는 막사발을 등한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김용문은 묵묵히 장작가마에 불을 지펴 막사발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수원에서, 서울에서, 전북에서, 경북에서, 중국에서, 튀르키예에서 전국과 전 세계를 떠돌며 전시회와 막사발축제를 열었다. 그리고 2010년 아예 한국을 떠나 튀르키예 앙카라에 있는 국립 하제테페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몇 해 전엔 수원시인협회와 함께 막사발에 시를 넣은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때 만났을 때도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운동 삼아 옛 서울대 농대에서 수원역까지 걸어오는 데도 서너 번 쉬었다 가자고 할 정도였다.
지난해 담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증세를 듣고 그 정도면 한국에서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튀르키예에 남아 있었고 갑자기 증세가 악화돼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말았다. ‘막사발 실크로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012년 펴낸 그의 시집 ‘마음 하나 다스리기가’엔 이런 시가 들어 있다.
‘마음 하나 다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태어나기도 어려웠겠지만
인생 마감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김용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런 시를 보내왔다.
내 빈 잔을 받으소서
내 빈 잔을 받으소서
내 잔이 넘치지 않고
아직 비어 있다는 것은 큰 충만이므로
잔은 비어 있을수록 아름다우므로
나는 아직 비어 있음으로써
당신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그동안 끊임없이 내 잔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한 일을 부디 용서하시고
내 빈 잔을 받아
먼동이 틀 때까지 높이 드소서
- 막사발의 대가 김용문 선생의 소천하심을 슬퍼하며...
정호승 시인은 자신의 문학관에 김용문의 막사발 작품을 별도 전시하며 김용문 막사발을 알리고 전하는데 애쓴 사람이다.
아스트로가 주최한 ‘김용문 막사발’ 전시에 함께 참여한 적도 있다.
김용문 아까운 사람, 너무 일찍 갔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퇴계학의 권위자인 후배 강희복 철학박사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골 맥주집에서 한쪽에 김용문, 한쪽에 강희복에게 주는 맥주잔을 놓고 명복을 빌었다. 곡(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