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32)] ‘호박순’과 ‘은행잎’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지난 월말 어느 날에 한 친목 카톡에서 사회학자 회원이 같은 회원인 시인이 쓴 두 행 시 「옛날 애인」, “봤을까?/날 알아봤을까?”를 참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자, 시인은 답례로, 그 시를 국립극장이 광고하던 연극 제목 「봤을까」에서 착안해 썼다고 하고, “시 쓰기는 그렇게 여기저기서의 경험들을 주워서 얽어 쓰는 것입디다. 순수한 자기 것은 없다고 하던 스승님 박목월의 말씀대로 입디다.”고 하였다. 즉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는 물론이고, 이웃의 삶과 정경을 관찰하고 가공하여 마침내 시를 얻는다는, 시창작의 한 이면을 자타의 경험으로 거론하고 스승의 시론이기도 하다고 회고하여, 또 독자들의 시 이해와 재미에 빛을 주었다. 그렇다. 시인은 우리보다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을 잘 관찰하고 동정하고 유대하기를 기꺼이 수행하고 대변해마지 않는 휴머니스트이다. 

 다른 회원과도 대화가 이어지자 시인은 언어예술인 시에서의 “평범을 비범처럼 느끼게 만드는, 언어를 다루는 재주”를 언급하며 “등단 60년이 넘은 저도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겸사이기도 하고 실제이기도 할 이 언급에서 우리는 시인의 창작 산고, 그리고 언어에 개재된 오묘한 광배(光背)와 시인과 독자의 인식에 연계된 언어사용의 미묘한 휘발(揮發)을 다시 가늠해볼 수 있다. 시인의 겸사가 이어지자 한 회원이 그의 시를 게시하였다. 

 

신문이 빈 벤치에 앉아 자꾸 손짓한다

 

가 앉아 펼쳐드니 은행잎들 떨어져 가린다

 

읽을 건 계절과 자연이지

시대나 세상이 아니라면서.  

        - 「노랑말로 말하다」(2012)/류안진

 

 짧고 명징하지만 이 시가 우리의 직관을 자극하며 일으키는 메시지와 각성은 크다. 여기서 ‘신문’ ‘빈 벤치’ ‘은행잎’은 3연과 비교 대조로 밀접하게 연계되면서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일상의 흔한 정경을 구성하는 소소 사물 그 자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환유나 상징으로 그 함축이 심상치 않다. ‘신문’은 독자에 따라 세부가 다르겠지만 대략 즉 이 ‘시대’와 ‘세상’에서 무성하게 반복되는 갖가지 사건과 사고, 나아가 결국 우리를 덧없게 우울하게 하는 인위와 욕망의 마뜩치 않은 허망한 현상들을, ‘빈 벤치’는 우리가 이 세계에서 생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요구되며 시공 제약이 전제된 존재의 거점(據點)을 내포하는 듯하고, ‘은행잎’은 해 달 별과 사시(四時)를 포함하여 대자연의 유구한 운행, 나아가 인간이 그 일부로서 따라야할 순명(順命)을 대리하는, 그 선명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는 일방 자연예찬이나 자연회귀 강조가 아니다. ‘시대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신문’처럼 ‘빈 벤치’에 ‘앉아’야 하고, 화자도 ‘가 앉아’ 그 ‘신문’을 ‘펼쳐’든다. 왜 그러는지 부연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사의 본문은 몰라도 금방 본문을 요약한 큰 활자 제목은 읽었을 것이고, 기사의 핵심을 파악했을 것이다. ‘은행잎들 떨어져 가린다’는 건, 화자가 그 자세한 본문을 읽으려 하는데 ‘은행잎들이 떨어져’ 그 본문을 차단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정경에서 알 수 있듯, 화자의 기본 태도는 현실 일탈이나 외면이 아니다. 이 시는 그러니까 무리하거나 이치를 왜곡하는 인위의 속악한 세태를 회의하며 자연의 정명(正明)한 질서를 우리 삶에서 참조하자는 취지가 없지 않다.    

 한편 ‘신문’이 ‘자꾸’ ‘손짓한다’, ‘은행잎들’이 ‘떨어져 가린다’란, ‘신문’과 ‘은행잎’의 의지를 부각하는 그 의인화도 이 시의 형상화를 생동하게 하여 독자의 감각에 적절하게 기여하며, ‘읽을 건 계절과 자연이지/시대나 세상이 아니’라는 결미의 메시지를 잘 수용하게 한다. 그런데 이 권유를 언급한 주체는 누구인가. ‘은행잎’인가 화자인가. 당연히 앞에서 의인화된 ‘은행잎’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화자가 ‘은행잎’의, ‘신문’ 위로 떨어져 ‘신문’을 가리는 행동에서 그 의사를 그렇게 추정한 언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낙엽에서 천하의 가을을 깨닫듯.       

 그날의 소통 여운에서인가. 비가 내린 그 이튿날에 시인은 “비 오시는 날 생각나는” “시”라며 자신의 스승 박목월(1915-1978)의 「봄비」를 게시하였다. 

 

조용히 젖어드는 초(草)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月谷嶺) 삼십 리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강마을의 봄비 시름을

 

장독 뒤에 더덕순

담 밑에 모란움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 안에서

호박순 새 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우리는 여러 계기로 시를 읽는데, 제자 시인이 스승 시인의 시를 소개한다면 그 시에 더욱 관심이 쏠릴 것이다. 비평가들이 추천한 시보다도. 아무래도 제자는 누구보다도 스승의 시를 가장 좋아했던 제일의 독자일 테고, 스승의 시세계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침잠했었을 테니까. 이 시는 박목월 선생이 1946년 동인지 『죽순』에 발표하였고, 첫 시집 『산도화』(1955)를 펴낼 때 개고하여 수록하였다. 

 ‘월곡령(月谷嶺) 삼십 리 피는 살구꽃’에서 우리는 선생의 유명한 「나그네」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나그네」의 정서와는 아주 다르다. 「나그네」가 일탈과 관조의 여백이라면 이 시 「봄비」는 특히 ‘그대 사는 강마을의 봄비 시름을’에서 알 수 있듯, 바로 ‘시름’이며, 그것도 ‘월곡령(月谷嶺) 삼십 리’에 걸쳐 내리는 비에 젖으며 ‘피는’ ‘살구꽃’ 같은 애착의 그리움이다.   이 시는 처음부터 우리의 심정을 인도하고 포섭한다고 하겠다. 1연 ‘조용히 젖어드는 초(草)지붕 아래서/온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를 읽으며 화자의 진술과 태도에 우리도 ‘조용히 젖어’들고, 실체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어떤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봄비는 계속 ‘조용히’ 내리고, 화자도 우리도 계속 ‘그대’를 그리워하는데, 문득 화자는 본다. 초가 ‘장독 뒤’의 ‘더덕순’과 ‘담 밑’의 ‘모란움’, 그 소박하고 정결하고 여린 모습을. 이로써 화자는 진술을 마감해도 괜찮을 텐데, 한마디 더 해 우리를 감전시키고야 만다.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 안에서/호박순 새 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더덕순’과 ‘모란움’의 상기 자질과 태도를 같이 가졌으면서도, 달리 어찌할 수 없는 무가내하(無可奈何) 순수한 ‘호박순’의 ‘사르르’ 펴나는 ‘새 넌출’ 전개. 그 모습은 동시에 화자의 그 시름 그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어 우리의 인간의 관련 심정 이해를 인도하여 공명하게 하는  자연 질서의 이치이자 축복이라고 하겠다.    

 한편, 그 정경의 시간은 그야말로 미세한 순간인데, 어떻게 찰나에 화자가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실제이든 상상이든 시인의 관련 시선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1854-1891)는 “시인은 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견자(le voyant)’의 자질은 ‘모든 감각의 이성적 착란’이라고 하였다. ‘호박순 새 넌출이 사르르 펴’나는 모습을 보는 시선을 그 유사한 안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빈 벤치’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었다가 ‘은행잎들’이 ‘떨어져’ 내려 가리자, 이 순간에 ‘읽을 건’ ‘시대나 세상이 아니라’ ‘계절과 자연’이라고 깨닫는 탄핵의 각성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