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63)] 김진대 '가슴에 붓 가는'
가슴에 붓 가는
김 진 대
바람이 가지 들고 화선지에 내려앉아
종이 울타리 안으로 산수유를 밀어서
가슴에 붓 가는 길을 내어놓고 나간다
봄날이 섭리를 방마다 걸어놓고
끊어진 바람을 종이에 가두니
쓴맛이 기웃거리며 입안에서 맴돈다
산수유의 언어를 공기로 발가벗겨
심장에 나무 심어 면벽에 걸었더니
빨갛게 익은 낙관으로 열매를 찍고 간다
적요(寂寥)다. 그 적요 속에 정중동으로 꽃망울들이 고개를 내민다. 겨울도, 그렇다고 봄도 아닌 아침에 핀 홍매화의 여린 꽃잎 위로 철 그른 눈이 소복이 쌓였다. 하지만 계절의 부름에 불어온 동풍 이내 잔설이 녹는다. 그때다. 산수유 샛노란 꽃망울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때가
‘바람이 가지 들고 화선지에 내려앉아/종이 울타리 안으로 산수유를 밀어서/가슴에 붓 가는 길을 내어놓고 나간다’
샛바람 한 자락이 문틈으로 새어들었다. 혼자가 아니다. 만개한 산수유 가지와 함께이다. 무심코 그 가지를 화선지 위로 내려놓는다. 바람이 산수유를 종이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이 먼저인지 시인이 붓을 들어 화선지 위에 꽃을 앉힌 것이 먼저인지는 따져서 무엇하랴. 비로소 가슴에 붓 가는 길이 닦였는데
‘봄날이 섭리를 방마다 걸어놓고/끊어진 바람을 종이에 가두니/쓴맛이 기웃거리며 입안에서 맴돈다’
어김없이 찾아온 봄이 생명의 섭리를 시인이 칩거 중인 방 안 가득히 걸어 놓았다. 하여 화선지 위에 핀 것은 꽃만이 아니다. 어느새 그 섭리를 실어 온 비단결 바람 한 자락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꽃이 만개함도 그저 봄날 한철이다. 꽃이 진 후 홍옥(紅玉)으로 다보록 다보록 달리는 붉은 열매를 생각한다.
‘산수유의 언어를 공기로 발가벗겨/심장에 나무 심어 면벽에 걸었더니/빨갛게 익은 낙관으로 열매를 찍고 간다’
산수유가 시인에게 던진 말씀의 씨앗들은 무엇이었던가. 곧 화두(話頭)였다. 꽃은 피었다가 진다. 생과 사보다 더 깊고 끊임없는 화두가 또 있었던가. 가슴 속에 나무 한 그루를 심고 면벽한다. 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때 꽃가지가 벼락처럼 던지고 가는 공안(公案)의 답은 낙관처럼 가슴에 찍히는 산수유 붉은 열매였다.
위의 시는 김진대 시인이 3년 전에 펴낸 시집 『빈손 화법』에 실린 「가슴에 붓가는」의 전문이다. 정형의 율과 운 속에서 면벽한 채 화두를 좇다가 번뜩이는 한소식처럼 빛나는 시심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시집을 읽는 일은 마치 좋은 술 한 잔을 앞에 놓고 있는 일과도 같다.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어쩌면 이 시는 계절과는 안 맞는 시일 수도 있다. 털털거리는 선풍기 앞에서 시집을 펼쳐 들고 더위를 쫓는 데에는 어쩌면 이렇게 계절과 어긋난 시를 읽는 일이 묘안이 될 수 있다. 더군다나 가슴까지 깨달음의 바람이 불어오는 이런 시라면.
김진대 시인
201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풋굿』
『빈손화법』
현재 경기시조시인협회 사무국장.